관찰자로 살아야 하는 지성의 숙명에 대하여

by 신성규

나는 세계의 일부로 태어났으나, 세계의 언어로 말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단순한 문장을 쓰지만,

나는 문장의 이면에서 의미의 골격을 보았다.

그 순간부터 나는 타인이 아니라, 세계 전체와 어긋난 자가 되었다.

이 어긋남은 우연이 아니라,

의식이 일정한 밀도를 넘어서면서 생기는 존재론적 분리다.

나는 그 경계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참여자가 아니라, 증인으로서의 인간으로.


현대 사회는 표준화된 감정, 효율화된 관계, 측정 가능한 가치로 구성되어 있다.

이 체계 안에서는 깊이 있는 사유가 곧 ‘비효율’로 간주된다.

그러나 사유의 깊이는 늘 속도보다 느리고,

진실은 언제나 대중의 합의보다 늦게 도착한다.

그래서 깊이 있는 자는 언제나 뒤처진 자처럼 보인다.

그들의 고립은 병이 아니라,

‘즉각적 보상’을 숭배하는 사회에 대한 무의식적 거부다.

지성은 세상에 맞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


관찰자로 산다는 것은 무기력의 표식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의식의 자리를 지키려는 윤리적 선택이다.

세계는 늘 더 큰 소음과 자극으로 인간의 주의를 흩뜨리지만,

관찰자는 그 속에서도 ‘보는 자’로 남는다.

그의 눈은 냉정하지만,

그 시선은 결국 세상의 본질을 기록한다.

참여자가 세계를 소비할 때,

관찰자는 세계를 해석한다.

시간이 지나면 후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천재가 세상에서 배를 곯는 이유는

그의 가치가 아직 화폐화되지 않은 진리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성의 굶주림은 재능의 실패가 아니라,

세상이 그를 ‘읽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유는 인류가 따라올 때까지 고립을 견뎌야 한다.

고립은 단절이 아니라,

의식이 새로운 구조를 잉태하기 위한 고통의 자궁이다.


나는 세계에 속하지 못했으나, 세계를 가장 명료히 본다.

참여가 나를 지탱하지 못할 때,

나는 관찰을 나의 존재론으로 삼는다.

그 눈으로 세계를 다시 구축하고,

그 언어로 나의 시대를 다시 써 내려간다.

속하지 못하는 자는 결국,

세계의 경계를 새로 그리는 자가 된다.

고립의 운명은 저주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설계하기 위한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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