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사랑이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라 믿었다.
그 모든 말은 진심이었다. 사랑을 위한 내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받는 방식이 아니었다. 누군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나는 그 고통을 빨리 없애주고 싶었다. 그런 말들이 내게는 사랑의 언어였고, 책임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 진심은 종종 오해받았다. 상처가 되기도 했다.
왜일까. 왜 내 진심은 사랑으로 읽히지 않았을까.
내 사고방식은 늘 인과적이고 논리적이었다.
사람이 고통을 호소하면, 나는 그것을 ‘문제’로 인식했고
즉각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배려이자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고통을 들었으니, 나의 역할은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나 스스로를 능력 있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했다. 하지만 정서적 공감을 기대하는 관계에서는,이 방식은 냉정함 혹은 이기적인 반응으로 보였다.
상대는 내게 말을 걸었다. “나 요즘 너무 뚱뚱해진 것 같아.”
나는 곧장 대답했다. “우리 둘 다 살을 빼자. 너무 뚱뚱해졌어.”
그녀는 상처를 받았고, 나는 당황했다. 나는 내 진심이 왜 상처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녀는 해결을 원한 것이 아니라, 공감을 원했던 것이다.
“그랬구나. 요즘 유난히 힘들었나 봐.”
“나는 널 여전히 예쁘다고 생각해.”
그 말들이 정답이었고, 나는 정답이 아닌 해답을 말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자존감 도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타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문제가 생기면, 고치면 된다.”
“결과가 안 좋으면, 더 노력하면 된다.”
이 방식은 논리적이지만, 인간적인 위로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내가 살이 쪘다고 느끼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게을렀구나. 바로잡자. 단호해져야 해.”
그리고 그 단호함을 타인에게도 똑같이 적용했다.
“우리 둘 다 살 빼야 해. 지금 상태는 좋지 않아.”
문제는, 그 단호함이 나에겐 ‘자기관리’였지만
상대에게는 ‘비난’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나는 공정하게 대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감정의 언어를 무시한 정의감이었다.
여자들이 화를 낼 때, 나는 “자존감이 부족한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존감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의 부재였던 것이다. 내 언어는 냉정했고, 효율적이었지만, 관계는 감정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나는 감정을 불완전하고 예측 불가능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감정보다 이성, 공감보다 구조를 중시했다.
이런 경향은 아마도 다음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감정보다 성과를 중시한 환경
실수를 두려워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감정을 억제한 경험들
이런 내가 누군가의 감정 표현 앞에서 방어적으로 논리를 꺼내는 것은 나름의 생존 방식이자, 불확실성에 대한 통제 시도였다. 나 자신이 거의 아스퍼거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헷갈리는 부분이다.
이 차이는 단순한 실수나 성격 차이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보는 방식의 차이였고,
사랑이란 결국 내 방식과 상대방의 방식을 조율해가는 과정이라는 걸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사랑은 수학문제가 아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정답을 맞춰도, 상대의 감정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랑은 누군가의 말에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지금은 안다.
사랑은 ‘정답을 말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머물러주는 일이라는 것을.
고민을 말하는 이 앞에서 해결책이 아니라 온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공감이란 “나도 그렇게 느꼈어”라는 말 이전에
“네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걸 내가 이해해”라는 태도다.
이제 나는 조금씩 배워가려 한다.
누군가의 말에 먼저 반응하지 않고, 잠시 숨을 고르고 묻는다.
해결은 잠시 미뤄두고, 여자들의 마음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법을 배우려 한다.
사랑은 내가 옳은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 아니라,
상대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확인시키는 것이니까.
나는 이제 문제해결자에서 공감자로 변해가고 있다.
그 변화는 느리지만, 사랑이란 본디 느린 호흡으로 배우는 예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