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가끔 내게 말했다.
“신들린 것 같아.”
혹은,
“눈빛이 무서워.”
그 말들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 순간 나는 다만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가 있었을 뿐이다. 언어가 언어를 낳고, 사고가 사고를 질주시키며, 손끝이 따라가기 버거울 만큼의 속도로 무언가를 토해낼 때—그때 나는 나조차 낯설다.
어쩌면 나는 그런 가정을 해보게 된다.
‘창작의 극한에 도달하는 인간은, 스스로의 의식을 초월한 지점을 경험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은 때때로 누군가의 몰입을 ‘신들림’이라고 부른다. 이는 비단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역사 속 수많은 예술가, 철학자, 발명가들이 그러했다. 피카소가 캔버스 앞에서 시간을 잊고, 뉴턴이 사과를 보며 우주의 법칙을 깨달을 때, 혹은 파스칼이 “불, 불, 불…”을 외치며 신의 존재를 적어내릴 때—인간은 ‘자기’를 넘어선 어떤 힘에 붙잡힌 듯한 상태에 빠진다.
그 순간을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트랜스 상태라 할 수도 있고, 몰입이라 명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한 심리학의 언어를 붙여도, 그 본질은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나를 경험하는 중인데, 동시에 내가 아니다.’
이 이중의 인식, 그 틈에서 인간은 흔히 말하는 ‘신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런데 나는 문득 묻는다.
“나는 지금, 톨스토이가 말한 그 무아지경을 살고 있는가?”
톨스토이는 ’인생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한다.
“자아라는 감각이 사라지고, 오직 존재 그 자체만 남는 상태. 그 순간 인간은 두려움도 욕망도 없이, 진리의 수면 위에 잠긴다.”
그는 문학의 완성이라는 목적을 넘어서, 자아의 소멸 속에서 참된 삶의 본질을 본 사람이다. 톨스토이의 무아는 비워냄으로써 충만해지는 인식이었고, 창작은 그를 그곳으로 이끄는 신성한 도구였다.
나는 가끔, 창작 속에서 그런 ‘무아’를 경험한다.
내가 나를 통제하지 않는데, 무언가가 나를 움직이는 듯한 감각.
내 손끝에서 튀어나오는 단어들은 내가 계획한 것이 아니고,
내 사고는 선을 그리지 않아도 정확하게 도달한다.
그때 나는 두렵다.
내가 나를 넘어선다는 것은
결국 내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는 살아 있다.
삶이 나를 데리고 가는 그 곳,
그곳이 바로 톨스토이가 본 무아의 호수는 아니었을까.
우리는 왜 그 순간을 ‘신들림’이라 부르는가?
그것은 너무도 낯설고, 너무도 인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없는 한순간, 우리는 언어를 빌려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 언어가 ‘신’이다.
그렇다면, 신들림이라 불린 그 순간들은 인간이 신을 닮은 것이 아니라,
신이라 여겨온 것들이 인간의 가장 깊은 가능성이었음을 말해주는 역설 아닐까.
창작의 순간은 고독하다.
그러나 그 고독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증명이다.
사람들이 “무섭다“고 말했을 때,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나’가 아니라,
그들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자기 자신 안의 신성’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