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를 이해한다는 것은 종교적 체험에 가깝다.
그것이 단순한 욕망의 해소가 아닌,
한 인간이 타인과 깊이 연결되고, 결합되는 경험이라면,
그 순간은 아가페에 닿는다.
사람들은 종종 섹스를 에너지의 방출이나
욕망의 소비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가난한 해석이다.
진정한 섹스란
내가 내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타인의 감각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다.
그건 일종의 몰아이고,
경계가 사라진 비자아적 통합의 체험이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통해 신과 연결되고,
어떤 사람은 음악이나 자연에서 무한한 것을 느낀다.
나는 말하고 싶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몸 안에서,
신의 기척을 느낀다.
섹스는 그 자체로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삶의 차원을 확장시키는 사건이 될 수는 있다.
그건 대상화가 아니라 ‘받아들임’이며,
정복이 아니라 ‘응답’이다.
그때 섹스는 더 이상 행위가 아니라
기도가 된다.
그것은 소모가 아니라 헌신,
지배가 아니라 관통된 감응,
육체가 빛을 품는 순간이다.
사랑은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욕망에서 시작해, 우정을 지나, 헌신에 도달하는 하나의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의 바깥에는 언제나 몸이 있다.
사람들은 섹스를 말하며 에로스를 떠올린다.
섹스는 단지 욕망인가,
아니면 인간이 서로에게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신비한 길인가?
에로스는 불이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에로스를 결핍으로서의 사랑이라 말한다.
무언가가 부족하기에 갈망하고,
닿지 않았기에 욕망한다.
에로스 안에서 몸은 소유의 대상이다.
섹스는 충돌이며, 충족이며,
내가 너를 “원한다”고 말하는 본능의 언어다.
하지만 에로스만 있는 관계는
항상 결핍을 전제로 한다.
사랑은 충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갈망하고 소비하며,
타자를 나의 만족 수단으로 변형시킨다.
섹스를 욕망으로만 이해하면 우리는
몸의 진짜 언어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그것을 타자와의 깊은 결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은 하나의 신비 체험이 된다.
필리아는 우정이다.
에로스가 불꽃이라면, 필리아는 불씨의 따뜻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아를
“선한 것을 함께 추구하는 관계”라고 정의했다.
이곳에서는 욕망이 사라지지 않되, 긴장 대신 평온이 흐른다.
이 관계 속에서 몸은 대화의 도구다.
육체는 교감의 통로로 사용되며,
섹스는 결핍의 충족이 아니라 신뢰와 안식의 표현으로 바뀐다.
필리아 안에서,
나는 더 이상 너를 소유하려 하지 않고
그저 함께 머물고 싶어진다.
아가페는 신의 사랑이다.
조건 없고, 계산 없고, 한없이 주는 사랑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인간을 향해 보여준 그 사랑.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결단이다.
아가페 안에서 섹스는
소유도, 표현도 아닌
헌신과 일체의 상징이 된다.
이 단계에서 몸은 성전이다.
타인의 몸은 더 이상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거룩한 존재로서 받아들여진다.
그 접촉은 ‘소유’가 아닌 ‘들어감’이며,
‘획득’이 아닌 ‘봉헌’이다.
신학은 오랫동안 육체를 의심해왔다.
플라톤주의의 잔재는 몸을 정신의 감옥으로 여겼고,
많은 종교에서 성은 죄와 연결된 영역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몸은 죄가 아니라 통로다.
몸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가장 직접적인 길이다.
아가페적 섹스는
내 육체를 내어주는 동시에
타인의 존재 전체를 안아들이는 종교적 체험이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나를 보호하지 않으며,
너의 감각을 나의 신전처럼 경외한다.
에로스가 사랑의 불을 지핀다면,
필리아는 그것을 대화로 확장시키고,
아가페는 그 불로 세상을 밝히는 신의 방식이다.
사랑은 욕망에서 시작하지만,
진짜 사랑은 몸과 감각을 통해 영혼을 만나는 일이다.
몸은 죄가 아니라, 구원의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