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누 Jul 28. 2020

19살에 300만 원 들고 캐나다로 왔다 #8

그리고 이민에 성공했다




#8 장학금



사실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며 돈을 버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돈을 버는 방법이 있다면, 단연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녔기에 자연스럽게 장학금을 노리게 되었는데, 조금씩 조금씩 알아볼수록 좌절해가는 나의 모습을 기억한다.


캐나다의 대학교들은 일단 외국인 학생에게 배려를 잘하지 않는다. 첫째로 자국민 학생보다 3배에 가까운 학비를 받으며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되는 나의 캐나다 친구들은 혀를 차며 신랄하게 학교를 욕했던 기억이 난다. 이건 나의 모교만이 아니라 모든 캐나다 전문대와 대학교 그리고 대학원들도 상황이 같다.



딱 봐도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난다.




그런 분위기의 캐나다 대학교에서 외국인 학생으로서 장학금을 받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다양한 장학금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애초에 자국민과 외국인 학생들은 프로그램 카테고리 자체가 달랐으니 아무리 많은 장학금을 지원한들 나에게는 해당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외국인 학생들에게도 몇몇의 장학금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금액이 자국민 장학금의 반의 반절이었지만 그래도 100만 원, 300만 원, 크게는 500만 원까지 받을 수 있다는 거에 조금은 희망이 생겼었다. 놀라운 건, 한국 유학원에서 지원하는 한국인 학생만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었다.


한국인에게만 지원했던 장학금, 현재는 바뀐 듯 하다.




장학금은 2학기가 지난 후로부터 신청할 수 있었다. 애초에 4학기 교육과정에서 2학기 이후에 신청하라니..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마음을 바로잡고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1학기 성적을 상당히 높게 받아서 Dean's Honours List라고 하는 성적우수생 목록에도 이름을 올렸고 학교 로비 대형 티브이에 내 이름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2학기부터 얘기는 180도 달라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학기 중반부터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기 시작했고, 알바 가게의 특성상 새벽 늦게, 일이 끝났기에 사장님의 배려에도 학업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성적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래도 성적관리를 잘해왔기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됐지만, 다른 학생들을 제치고 몇 안 되는 장학금을 받을 만큼의 경쟁력이 있는 성적은 결코 아니었다. 


장학금의 자격조건은 크게 세 개였다. 국적, 성적, 그리고 자원봉사.


성적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나는 바로 자원봉사로 눈을 돌렸다. 그렇게 해서 나의 학교+알바+자원봉사의 미친듯한 스케줄은 시작되었다. 30분이라도 시간이 된다면 자원봉사를 했다. 학교 내에서 봉사하며 신입생을 안내하기도 하고, 학교 축제에서 일해보기도 하고, 온타리오주에서 주최하는 콘퍼런스에서도 하고,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지 다 했다.


그리고 장학금을 신청했다.


안 그래도 바쁜 스케줄에 무리하여 준비한 장학금이기에 조금의 희망은 갖고 있었고, 하루하루 답변을 기다렸다. 그렇게 쏟아부은 나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학교에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스펙을 위해서 신청한 장학금도 아니었고, 순전히 돈만 보고 달려들었던 거였기에,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학업보다 알바에 더 시간을 할애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유학생활을 이어갈 것 같다.




내가 다녔던 George Brown College




작가의 이전글 프렌즈로 쉽게 배우는 영어 표현 #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