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걷기

by 꽃마리

오늘도 걷는다. 걷기도 운동이라면, 살면서 유일하게 재미 붙인 운동이 바로 걷기다. 사실 걷기가 운동이 되려면, 보폭도 평소보다 넓게 유지하고 속도도 평소보다 빨라져서 땀이 나는 정도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만의 속도로 어제도 오늘도 걸었다.

혼자 걷다 보면 누군가와 같이 걸을 때는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무언가가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담배꽁초나 담뱃갑, 일회용 마스크처럼 의도적으로 버려진 것들도 있지만, 무심코 사람의 몸에서 떨어져 홀로 나뒹굴고 있는 것들도 있다. 양말 한 짝이나 볼펜 같은, 주인을 잃은 물건들이다. 어디서 떨어트렸는지 주인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사물들은 며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영영 사라진다.


출퇴근길에 만나는 주유소 풍선은 꽤 오랫동안 나의 친구였다. 다만 안쓰러운 친구였다. 거대한 몸이 팽팽하게 부푼 채 일정한 속도로 한 팔을 착착 접었다 펴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한 팔로 “여기서 주유하고 가세요”를 외치고 있었다. 얼굴에 눈과 입이 있는 그 친구의 팔목이 저러다 꺾일까 봐 나는 마음이 시렸다. 나는 그 친구가 일을 하지 않길 바랐기에 맑은 날보다 비가 오는 날이 더 좋았다. 비가 오면 몸에서 바람을 빼고 어디에선가 쉬고 있을 터였다. 내 마음을 조심스럽게 선배에게 털어놓았다가 이런 소리를 들었다. “드디어 맛이 갔….”


꽃이 홀대받으면 더 속상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때면 샛노란 금계국이 장관을 이룬다. 보통은 길 가장자리에 무리 지어 있는데, 사람 다니는 보도에 자리 잡은 금계국이 있었다. 무리와 떨어져서 “나는 금계국이다!”라고 외치고 있는 듯한 모습이 용기 있어 보이다가도, 눈치 없이 저러고 있다가 누군가의 눈에 띄어 뿌리째 뽑힐까 봐 조바심이 났다. 두 달을 버티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 친구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뒤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어쩌면 사달이 났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발동했다. 눈에 띄었을 텐데 그냥 지나쳤다는 것은 보이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감은 적중했다. 주변을 맴돌았다. 혹시 이 자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에 뒤로 갔다 앞으로 갔다 하다가 기어이 날카로운 도구에 의해 싹둑 베인 자리를 확인하고 말았다. 작정하고 뽑은 흔적이었다. 때가 되면 저절로 질 꽃이었는데, 그냥 둘 수는 없었던 걸까. 도구를 가져와 그 꽃만 도려낼 정도로 두려운 이유가 있었을까. 잔잔한 풀꽃이었다면 거슬리지 않았을 텐데, 사람 다니는 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던 죄로 큰일을 당하고 말았다.



사물이나 꽃에 감정을 심하게 이입하다 보니 걷다가 자주 멈추게 된다. 걷다가 갑자기 쭈그리고 앉아서 풀을 관찰하거나 꽃 사진을 찍는 모습이 차를 타고 출근하는 동료들에게 목격되기도 한다. 땅을 바라보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내 모습을 본 동료들은 그러면 운동이 되지 않는다고 훈수를 둔다. 소중한 조언을 조금은 받아들이기로 한다. 요새는 출근길에는 평소대로 천천히 걷고, 퇴근길에는 조금 더 빠르게 걸으려고 한다.


걸을 때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데 대부분은 유실되고 만다. 꼭 부여잡고 싶을 때는 스마트폰 메모장에 단어를 남겨 두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남겨 둔 단어들이 잘 연결되지 않는다. 단어들이 문장이 되지 못하고 날아가는 게 아쉽지만, 그것도 괜찮다. 걸으며 만난 남겨진 사물들과 매일 전성기를 지나는 꽃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걷기의 효용은 완벽하다. 오늘도 나의 속도로 걷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