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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yking Sep 08. 2021

서른 살, 우울의 원인에 대한 고찰 (12) 친구 관계

#12. 변해버린 우정에 당황스러울 때


친구, 우정.

사춘기 시절을 훌쩍 지나 서른이 넘어서까지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나도 정말 몰랐다. 어른이란 수많은 관계 연습과 그간의 경험을 통해 교우관계쯤은 정말 통달해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서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인간관계는 어느 나이대에서만 고민하게 되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나보다 더 어른이라고 더 잘해나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보다 더 어린 사람으로부터 배울 점도 아주 많다. 인간관계란 정말 묘하다.



사람은 변한다. 그리고 관계도 변한다.

 서른 이전, 그간 나를 지탱해주고 나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주로 ‘한때 가장 붙어 다닌 친구’들이었다. 성장하면서 나의 소속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등으로 점차 바뀌어갔고 각각의 소속에서마다 ‘일상을 공유하는 소중한 친구’가 하나둘씩 생기면서 그 수는 점점 늘어갔다.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항상 깊은 속 얘기를 나눌 친구를 한 명씩은 옆에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매일같이 함께 다니던 시기를 지나, 각자 서로의 삶을 바삐 살아가다 문득 그 시절을 향한 그리움에 서로에게 연락을 하며 만남을 지속했다. 절대로 내 인생에서 빠져나가지 않을 것만 같은 친구.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끈끈해지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었으며, 나 또한 받았다. 나에게 네가 소중하듯, 너에게 내가 소중하고 그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서 한치의 의심도 없이 ‘진실’이었다.

‘너에게 나는 베스트 프렌드’라는 생각 속에서 때로는 마치 애인에게 느끼는 듯한 일종의 독점욕도 느꼈던 것 같다. 타인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일종의 뿌듯함 같은 것도 있었다. 의지하고 싶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의지가 됨이 뿌듯한 그런 느낌은 정말로 건강하고 아름다웠고 우정으로 인한 행복감이 무엇인지 내게 가르쳐주었다.  

계속 그렇게 예전처럼 지내고 싶다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었을까.

달라지는 환경과 강해지는 자기 정체성 때문인지, 한때 그리도 잘 통하던 친구들 중 몇몇은 점차 서로를 이해하기가 어려워졌다. 예전처럼 모든 말끝마다 공감하며 찰떡같은 호흡을 자랑할 수도 없다. 혹자는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변한다. 나도 변했듯 누구나 변한다. 생각해보면 세월의 경험 속에 변하지 않고 그대로 머무른다는 것은 오히려 인간적이지 못한 일이다. 경험에 따라 성격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변해갔다. 그렇게 생각과 행동이 변하면서 그 끝에는 사람도 함께 변해간다. 그리고 사람이 변하면 ‘관계’는 이를 기반으로 더욱더 크게 변했다.



쌓여가는 친구의 수

어렸을 때는 살아온 생이 길지가 않아 깊은 관계를 맺는 친구의 수 자체가 많지가 않다. 1년에 한 명씩 죽마고우가 된다고 하더라도 10명이 채 되지 않으니, 마음만 먹으면 진심으로 관계에 정성을 다하는 일이 어렵지가 않다. 그러나 서른 즈음이 되면 여기저기 소속되었던 단체만 해도 그 수가 수십 개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시절 속에서 가까이 지내던 모든 친한 친구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챙기기에는 나 자신의 여유시간 자체가 별로 없다. 삶의 여유가 없어져 내 삶 하나 건사하기 힘들어진 직장인의 삶에서 시절의 인연들을 모두 챙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하나하나의 관계에서의 정성도가 떨어진다. 예전만큼 애틋하게 서로를 챙기기가 어려워져 버렸다. 모든 것을 욕심 들여 이끌고 가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이 인생 전반에 걸쳐서 필요한 시기가 되어버렸다. 우정도 물론 이 진리를 피할 수 없다. 서른 즈음에도 이런데 마흔, 쉰이 되면서 각자의 새로운 가정에서 새로운 역할들을 수행하고 더욱 어려운 난관들에 부딪히느라 점점 더 그러하겠지? 아, 나는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삶에 여유가 생겼을 때는 이렇게 모두를 잃어버렸을 것만 같다.


우정의 변색과 우울함에 대하여

나는 가끔씩 익명의 공간에서 ‘내 결혼식에 누가 올지, 하객이 너무 적을까 하여 걱정돼요.’라며 걱정하는 글들을 종종 본 적 있다. 나는 그런 글들에 이런 댓글을 달았다.

“진심으로 상대방을 대하고, 그간 함께하던 사람들에게 소중히 연락을 지속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당신 주변에 당신의 사람들이 머무를 거예요. 한 단체에서 한 명씩만 그렇게 두어도 나중에는 수십 명이 돼요.”  등등.

그런 댓글을 달 때만 해도 나에게는 정말로 너무나 잘 통하고 소중하고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친구들이 아주 많았다.

그런데 서른 즈음이 되면서 점점 내 테두리 안에 머물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 울타리에서 빠져나갔다. 본인은 머무르고자 하였으나,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사람도 있다. 반대로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먼저 걸어 나간 적도 있다. 나는 처음 이 현상을 겪었을 때 정말로 견딜 수 없이 우울해졌다. 나를 지탱하던 탄탄한 주춧돌이 하나 빠져나가 온통 뒤틀리고 흔들리는 기분을 느꼈다. 대표적으로는 아래와 같은 일들로 인해 그런 기분을 느꼈다.

내가 참으로 힘들어 고민을 토로했을 때, 갑자기 자기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힘듦을 더욱 추켜세우고 나의 고통은 별 것 아닌 듯 대하는 친구의 말에 너무나 우울했다.

내가 무언가 잘 되었을 때, 어딘가 모르게 기운 빠진 말투로 ‘정말 축하한다’고 말하면서도,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우울한 표정을 짓던 친구의 얼굴에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나의 본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던 친구. 나를 향해 훈수를 두는 말들에서 이제는 도가 지나쳤음을 느꼈다.

때로는 그 누구에게도 잘못이 없지만, 사는 환경이 너무 달라져서 그만 더 이상 관심사가 겹치지 않아 대화가 쉽사리 이어지지 않는 아쉬운 친구도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의 고민은 이야기하지 않으며, 잘 지내고 있다는 표현만 잔뜩 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거짓된 행복’만을 내게 보여주려 하는 친구도 있었다.

아주 잘 통하는 친구였지만 하필 성별이 나와는 다른 친구. 남녀 사이에 친구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나도 막상 유부녀가 된 지금은 왠지 모르게 더 이상 예전과 똑같이 관계를 지속하기가 어려워진 친구도 있다. 내가 남자였더라면 너와 정말 죽마 고우였을 텐데, 하며 아쉬워할 만큼 말이다.

 

이 모든 변화들은 나를 정말로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가 그 친구들과의 탄탄한 관계에 의지하며 느꼈던 행복이 정말로 컸기 때문일까.

 15살의 너와 나, 20살의 너와 나, 25살의 너와 나는 그 누구보다 심리적으로 가까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것은 과연 자연스러운 인생의 섭리인 것일까.


처음에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예전처럼 관계를 지속하고자 노력했다. 내 생각과 다르다 하더라도 눈 감아주고, 공감이 가지 않더라도 끄덕여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나에게 엄청난 ‘부담감’을 주었다. 마치 의무감에 친구를 만나고 있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너의 베스트 프렌드이니까.

너는 나의 베스트 프렌드니까.

베스트 프렌드라면 응당 해야 하는 그런 반응과 행동들을 잊지 않고 지키려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점점 불편감은 심해졌다.

‘이게 뭐지…? 너와 나 속의 진실은 무엇이지?’

정말로 불편한 진실 중 하나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친구를 사귀기가 학창 시절과는 달리 어렵다고들 말하는데 어쩌면 30대가 된 지금의 네가 지금의 나와 처음 사회에서 만나게 된 인연이었더라면 우리는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만 같다.


 서로가 힘들어서 그래.

서른 즈음이 되면 점점 인생의 속도가 제각각 달라지면서 각자 저마다가 마음의 병을 앓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가 겹쳐버리면 실로 최악이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마음의 여유가 없는 자와 마음의 여유가 더 없는 자의 만남이란 그 누구도 서로를 보듬어 줄 수가 없어 안타깝다. 아마 서로가 서로에게 인생친구라 하던 너와 내가 틀어지는 그 순간에는 우리는 각자 지독한 마음의 장마철을 겪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네가 아니고, 너도 가 아니기에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는 없지만 ‘장마를 겪고 있는 그 심정’은 공감할 수 있으니 그 힘겨움이 무엇인지 안다. 두 사람 모두 장마철을 끝마치고 맑은 마음으로 만난다면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웃으며, 아무런 거짓 행복 없이, 비교나 질투 없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


다행히도 그렇게 다시 돌아오는 관계도 있었다. 변해버렸을 당시에는 일기장에 수도 없이 적었다. ‘너와의 관계가 변해서 슬프고 괴롭다’고. 그러나 어느 날 다시 적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너는 다시 예전과 같이 내 마음으로 다가왔다. 역시 너는 사랑스럽고 소중했다. 너무나 다행이다.’

 그러나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서로가 남보다 못해진 친구도 있다. 십수 년이 무색하게도 그저 스친 ‘지인’ 보다도 못해진 그런 친구. 어느 날 문득 보니 나를 차단한 것 같았다. 특별히 싸운 적도 없이 평일 오후 업무시간에 갑작스레 문자로 서운함을 표현하더니 그렇게 나의 울타리 밖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거센 장맛비가 내리고 있던 시기에 벌어진 그 일 속에서, 나는 네가 야속하여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취하지 않았다. 이렇게나 바쁘고 힘든 인생에서 그 관계를 억지로 끌고 갈 수가 없다. 결국 우리는 여기까지인 건가. 열병 같던 사랑보다도 더욱 허무하다.


힐링 추천 - 김미경 언니의 따끈따끈 독설#77

 

우정으로 인해 너무나도 우울하던 내가 유튜브를 통해 좋은 강연을 찾아다니다가, 이 주제에 대해 다룬 영상을 보았다. 바로 ‘언니의 따끈한 독설’로 유명한 강사 김미경 씨의 말이다. 그 중 내 마음을 건드린 말들을 몇가지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모든 사람과 인연을 맺으면 그것을 끝까지 끌고 가세요? 10년 20년을 끌고 가는 관계는 드물어요. 많지 않은 게 정상이에요. 다 끌고 갈 순 없어요.’

‘내 인생에 그 사람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나보다. 그때 나한테 참 고마웠어.

‘그 인간관계를 예쁘게 포장해서 3년 전 그곳에 두고, 나는 떠나와서 내 생활을 하는 게, 나를 생각하고 나를 사랑하는 인간관계 해석법이다.’


내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라 생각하며 자책하지 말고, 시절의 인연에 집착하지 말고 이제 그만 그곳에 예쁘게 놓아두라는 그 말이 나는 개인적으로 가장 위로가 되었다. 김미경 언니(언니라고 하기엔 꽤나 나이와 경험의 차이가 나지만, 인생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은 언니라고 하자.)의 강연을 들으면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이 외에도 많은 주제들이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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