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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yking Oct 05. 2021

서른 살, 우울의 원인에 대한 고찰 (17) 자아 거부

#17. 사랑스러운 나 자신의 실망스러운 실체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사람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사람이 있을까? 그 ‘사람’에는 나 자신마저 포함된다.

나는 세상 누구보다도 나 자신의 행복을 바라며,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 하지만 이런 나의 마음과는 다르게 종종 아무도 뭐라 한 사람이 없이도 스스로를 끔찍이 실망스러워할 때가 있다. 나의 단점을 마주하는 게 힘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인정하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괴롭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이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나는 그저 나일뿐인데, 그런 자신을 인정하는 데까지 왜 그렇게 큰 용기가 필요한지 모를 일이다. 나는 나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큰 것 같다.


살다 보면 가끔씩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들을 만난다. 나르시시즘이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서 물에 빠져 죽었다는 데서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뛰어나다고 믿거나, 스스로를 사랑하여 자기중심적 성격을 띠는 사람들을 나르시시즘에 빠졌다고 한다. 나는 한때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매우 싫어했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스스로 칭찬하기 바쁘고, 주변의 사람들은 다소 깔보는 불공정한 모습을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감싸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강한 깔아내림과 비판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정말이지 어리석어 보이기 짝이 없다. 그러나, 우울의 늪에 빠져있을 때는 그런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들이 심지어는 부럽기까지도 했다. 그들은 어떻게 한치의 의심도 없이 자기 자신을 그렇게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런 모습은 조금은 배워야 하는 모습이지 않았을까. 자존감이 곤두박질치며 낮아지고 있던 나는 물에 비친 내 모습을 사랑하기는커녕 눈을 피하기 바빴다. 겸손과 배려심을 미덕으로 배웠지만, 어쩌면 우울함의 늪에 빠진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잘난 척과 이기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을 향한 권태기

많은 사람들이 애인과 불꽃과 같은 사랑을 시작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시점에서 권태기를 경험한다. 가끔은 절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권태기가 찾아온다. 나의 직업과도 권태기가 찾아온다. 한때 동경하고 사랑해 마지않아 소유하려 했던 것들을 향해서도 하루 종일 붙어있고 속속들이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 순간 권태기는 찾아온다. 하물며 나 자신은 오죽할까. 한평생 24시간 붙어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하찮아지고 미워지는 것도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머릿속에 동경하는 이상적인 사람의 모습이 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과 지냄에 있어서 의견이 부딪힐 때 상대방을 배려하고 기분을 맞춰주며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을 멋지다고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오히려 그 반대로 타인에게 강단 있게 자기 논리를 펼치며 주장을 펼치는 사람을 보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결국 ‘내가 가지지 못한’, ‘내가 지향하고 있지만 잘 안 되는’ 특성을 향해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흔히 ‘반대가 끌리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멋진 건 그런 거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쟁취하고자 해도 잘 안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그런 것. 바꾸어 말하면 내가 가진 장점들은 익숙하고 당연하여 하찮아지고,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동경으로 결핍감을 느껴 스스로가 못나 보인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그런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말이다.


#페르소나와 자아의 불균형으로 인한 자아 거부

나는 다소 내향적인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외향적인 성격을 동경한다. 학기초면 나는 새로운 친구들 앞에서 외향적인 척을 하며 어색한 가면을 썼다. 최대한 밝은 척을 하고, 쿨한 척을 하고, 다양한 활동을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많은 친구들이 좋아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 했다. 성격 좋고 인기 많고 리더십 강한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나는 아주 소심하고, 행동 하나하나 곱씹느라 늘 조심스러워 관계에서도 타이밍을 놓칠 때가 많으며, 마음의 문을 여는데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 성격이라 다수의 사람들을 대하기를 힘들어하는 사람이다. 소수의 사람들과 있을 때 나누는 개인적인 대화를 훨씬 재미있어하며, 사람이 많은 무리일수록 거리감을 많이 느낀다. 타인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라, 리더십은 항상 나의 숙제 같은 부분이고 잘 발휘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런 나를 인정하기 싫고 들키기를 싫어하여,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가끔씩 스스로 연기를 하나보다. 성공적인 페르소나를 발휘하게 된 어떤 소속집단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굉장히 쾌활하고 리더십 있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이를 실패한 또 다른 집단에서는 나를 조용하고 소심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구인가? 여러 페르소나들을 충실히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내면의 내향성과 소심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내가 보이고 싶은 나’로 행동하지만, 나는 결국 ‘원래의 나’로 머물며 연기로 인한 피로감만 쌓여가는 것이다.  결국 ‘나’는 ‘내가 보이고 싶은 나’는 아니라는 사실을 결코 마주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나 자신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않으면 거기서부터 많은 것들이 꼬이기 시작한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나 자신이 어려워하고 스트레스받는 상황에 자꾸만 노출되려고 다가간다. 그리고 마음처럼 잘 되지 않으니 좌절한다. 예를 들어, 나는 공부가 싫은 사람이지만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키워둔 나의 페르소나이자, 내가 동경하고 지향하는(그런 것으로 착각하는 거짓 자아) 사람의 모습이 ‘학문에 정진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를 좋아하는 척 해가며 석사 그리고 마침내 박사 학위를 딸 때까지 수년간을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훌륭한 성취 끝에 마침내 모든 학위 졸업장을 따내지만 그 속에서 괴로움은 증폭되고 그 성취 끝에 결국 ‘나는 행복하지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애가 강한 친구들은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편하게 말을 이어가면서도 이런 말들을 자연스럽게 한다.

“나는 친구가 많지 않아.”

“나는 집순이야.”

“나는 솔직히 성격이 좋진 않아.”

“나는 진득하게 노력하는 거 못하는 스타일이라 수험생활은 안 맞아.”

“나는 솔직히 내 전공 쪽으로는 재능이 없어”

이런 친구들을 보면 정말이지 너무 건강해 보이고 부럽다.  사회적으로 많이들 요구하는 성향으로 보이고 싶어서 나라면 스스로 숨기고 자존심 부리느라 입 밖으로 절대 내뱉지 않을 말들을 그 친구들은 건강한 자존감을 지키면서도 서슴없이 타인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자세들은 보통 내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 대한 분석은 결국 스스로를 평안으로 이끄는 것 같다. 그것은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을 피하고, 내가 잘하는 것들을 하려 노력하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그만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내 삶을 채워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가도 성공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어렵고 힘들고 복잡한데, 내가 잘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 스스로 이상한 페르소나를 덧씌워가며 붙잡고 있는 수많은 것들 때문에 인생은 점점 더 꼬여간다.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이 행복한 삶에 얼마나 강력한 도구인지 이제는  것 같다.


#행복해지는 간단한 방법, ‘좋아하는 것을 조금 더 하기’

그러고 보니 옛 성현들이 이미 이러한 가르침을 주기 위한 많은 말씀을 남기셨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책들은 서점에 가면 고전에서부터 현대까지 상당한 양을 차지한다. 다들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 가는 길을 찾아나가고 있었는데, 나는 나 자신을 외면하려 한 채 그로 인한 우울에만 빠져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여러 가면 중 하나를 고르기 급급했고, 그 가면 밑에 있는 나 자신의 진정한 얼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건강하게 받아들일 때,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사랑하며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갈 수 있다. 아직은 여전히 어렵지만 조금씩 나 자신을 찾아나가기 위해 오늘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중이다. 나를 위해 나와 대화해가며 나의 삶을 꾸려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약간 시작만 했을 뿐인데도 이미 비구름이 많이 걷혀가고, 생기 넘치는 삶으로 향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삶의 자세였던가 보다.


 어디선가 행복해지는 간단한 방법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싫어하는 것을 조금 덜하고, 좋아하는 것을 조금 더 하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논리였다. 그런데 이것이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나는 안다. 나는 우울감에 빠진 나 자신을 구출하고자 했을 때, 내가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간 만들어진 나의 수많은 가면들로 얼룩져 진짜 나의 얼굴이 무엇인지, 무엇을 할 때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런 것들을 알아차리기마저 힘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모른다면 그 누가 알 것인가. 서른의 나는 아직 많이 미숙해도 시간이 흘러 좀 더 지혜롭고 성숙해질 40대의 나 나의 자화상을 들여다보며 나르키소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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