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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몬라떼 Oct 17. 2022

계획이 없으면 틀어질 일도 없다

지금 돌아보는 나의 어린일기 #3

#1

나는 MBTI 검사를 하면 J(Judging, 계획과 통제형)가 95% 나오는 사람이다. 해외여행을 갈 때는 지도 앱으로 철저히 동선을 파악해서 엑셀에 날짜와 시간대별 계획을 적어 간다. 부모님을 모시고 도쿄 여행을 갈 때는 계획을 PPT로 만들어서 드린 적도 있다. (이건 우리 엄마 아빠 역시 극심한 계획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했지만... 피는 못속여.) 매일 밤 자기 전에 다음날 입을 옷을 정하고, 다음날의 시간대별 동선을 한 번 생각해 본다. 주말도 예외는 없다. 항상 머리속에 내일의 내가 무엇을 할지가 들어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J의 반대인 P 성향이 강한 친구들을 만나면 서로 진심으로 신기해 한다. J형들의 또 다른 특징은, 계획을 짜기만 하는게 아니라 본인이 생각한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불안감이나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것이다. 예전에 아는 사람이 P형인 본인과 J형인 자신의 친언니 얘기를 해준 적이 있는데, 같이 여행을 가기로 한 날 아침 늦잠을 자는 바람에 친언니의 계획이 모두 틀어져 언니가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반면 본인은 늦게 일어났으면 늦게 일어난대로 그 때부터 움직이면 될 것을 왜 화를 내는지 이해가 안됐다고. 나는 여기서 딱 한 마디 했다. "나는 애초에 늦잠을 자본 적이 없어!"


2004. 11. 10. 9살 때의 일기

18년 전의 일기를 읽고 내가 슈퍼 J형 인간이 된 이유 중 하나를 찾았다! 명심보감!

'하루의 계획은 새벽, 1년의 계획은 봄, 일생의 계획은 젊을 때'라니... 고작 9살이었던 저 날의 나는 다음날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잤을까? 안타깝지만 명심보감에 나오는 이야기면 다 새겨두겠다는 계획은 실패했단다 얘야. 어른이 된 지금은 모두 잊어버렸어!


일기에 나오듯이 실제로 나의 부모님은 미리 계획 세우기를 많이 강조하셨다. 항상 머리속에 목표와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기에 지금 우리 가족 4명은 모두가 J형이다. 아빠는 두 딸들이 집에 내려가는 날이면 요일별로 뭘 먹고 뭘 할지를 줄줄 읊으신다. 세 모녀는 적당히 좀 하라고 말은 하지만, 그런 아빠의 모습에 우리와 함께 보낼 날에 대한 기대가 보여서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


#2

그런 내가 얼마전 혼자 떠난 춘천 여행에서 '꼭 계획이 있어야 할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최근 인간 관계에 회의감을 많이 느끼고 정신적 쉼이 필요해서 떠난 여행이었는데, 이마저도 2박 3일의 계획을 시간대별로 쪼개서 휴대폰에 기록하고 떠났다. 동행이 없으니 모든 것이 내 맘대로라, 혼자 여행을 할 때는 계획 지키기가 훨씬 수월하다.


하지만 일단 날씨부터가 예상과 달랐다. 우천 소식이 있기는 했지만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챙겨간 옷을 모두 껴입어야 했다. 원래 첫째날 가려고 했던 책방에 도착했을 때는 자리가 없어 나와야만 했다. 갈 곳은 없어졌고, 밖은 너무 추우니 하는 수 없이 게스트하우스에 일찍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첫날부터 계획이 다 틀어져서 심란해진다. 오늘 못간 책방은 그럼 내일 가나, 내일 가려고 했던 곳은 어떡하지? 내일도 추우면 옷은 어떡하지?

모든 것이 좋았던 게스트하우스 '춘천일기'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내려간 게스트하우스 1층 로비. 아늑하게 꾸며진 공용 공간에는 다양한 책들이 놓여 있었고,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책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겠지만, 거기서 읽든 여기서 읽든 독서라는 행위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끌리는대로 집어든 책은 앉은 자리에서 쭉 다 읽을 만큼 좋았다. 무심코 앉은 자리에서는 주인 부부가 열심히 꾸며두신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보여서 좋았다. 로비 가득 풍기는 춘천의 매력이 담긴 디퓨저 향도 좋았다. 밖은 춥지만 게스트하우스 안은 따뜻해서 좋았다. 그냥 모든 것이 좋았다.


계획이 틀어져도 이렇게 좋다니! 아까의 나는 왜 그렇게 심란했을까. 그래봤자 바뀌는 것은 하나 없는데 말이다. 못갔던 책방은 내일 가도 되고, 그곳을 대체할 다른 가볼 곳도 많은데.

계획 없이 왔으니 틀어질 일도 없다! '썸원스페이지숲'


다음날은 숲속에 있는 북스테이를 찾았다. 온전히 편히 쉴 수 있게 꾸며진 방 한 켠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계획 없이 왔으니 틀어질 일도 없다.'

애초에 틀어질 계획이 없다는 거, 딱 나한테 필요한 말이잖아? 그냥 쉬러 온 건데, 쉬는 것까지 계획이 있을 필요는 없지. 그 문장을 본 후로는 머리에서 계획을 깔끔하게 비웠다. (아니 비우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계획에 없던 책을 읽었고, 아침에는 문득 창밖의 꽃을 그렸다. 최대한 아무 생각 없이, 그 때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즉흥적으로 움직였다.


즉흥성은 언제든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삶의 여유를 만든다. 빡빡하게 계획을 짜고 통제하면 돌발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이 언제나 예상한대로 흘러가지는 않기에, 상황에 맞는 대처가 필요하다. 이 여행 이후 나는 수많은 계획들로 가득찬 인생에서 조금의 빈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삶에 즉흥적인 낭만 한 스푼을 더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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