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돌아보는 나의 어린일기 #4
한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면 '넌 꿈이 무엇이니?', '장래희망이 뭐니?'와 같이 미래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묻는 질문을 많이 받게 된다. (다른 나라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어릴 때는 선생님, 간호사, 소방관, 과학자 같은 직업들이 답변으로 많이 나왔는데, 요즘에는 유튜버나 콘텐츠 크리에이터, 프로게이머 등의 직업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확실히 시대가 많이 변했다.
어렸을 때 유행했던 TV프로그램 '러브하우스'의 영향으로 언젠가부터 건축가를 꿈꿨었다. 낡고 오래된 집을 세련된 인테리어와 외관으로 탈바꿈 시키는 건축가들이 신기하고 멋져 보였다. 같은 면적의 공간인데도 훨씬 넓어보이게 바꾸고, 그저 벽 색상을 바꿨을 뿐인데 분위기가 달라보이고. 그 때부터 수년간 건축가, 건축 디자이너를 꿈꾸며 가족들에게 나중에 커서 집을 지어주겠다고 하고 다녔다. 땅값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순수한 시절!
건축가가 되고 싶었던 9살의 나는 블럭도 쌓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구나 싶어서 이 일기를 읽고나니 스스로 참 대견하다. 비슷한 시기에 최초로 남극점을 탐험한 로알 아문센의 위인전을 읽고, 책에 나온 구절 중 '꿈이 있는 사람은 멈추지 않고 도전한다'라는 문장에 깊이 감명 받은 경험이 있다. 그 후로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것에 도전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
그 후로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나의 꿈은 서서히 변해갔다. 중학생 때는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님의 영향으로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가, 고등학생 때는 박서원 두산매거진 대표의 '생각하는 미친놈'이란 책을 읽고 광고인과 카피라이터를 꿈꾸기도 했다.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몇 년 동안에는 국제 정세와 시사 이슈를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매일 아침 신문 스크랩을 하고 영어 공부에 빠져있었고, 학생들이 진행하는 모의UN 대회에 참가했다. 광고인을 꿈꿀 때는 학생회 홍보부장을 맡아 미숙한 포토샵 실력으로 각종 행사의 포스터를 만들고 다녔다. 꿈과 장래희망이라는게 명확했을 때는 그에 맞는 노력을 계속 해온 것이다.
하지만 막상 성인이 되니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기가 꽤나 어려웠다. 내 주변 친구들과 선배들은 공/사기업 취업준비를 하거나, 로스쿨 진학을 하거나, 회계사와 행정고시 같은 고시 공부를 하거나 셋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에서 문과를 졸업하면 이렇게 정해진 틀 안에서 흘러갈 수 밖에 없나 회의감이 들었다. 지금 내가 하고싶은 일을 찾는게 맞는 건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억지로 맞추어야 하는 것인지. 나 말고 다른 친구들도 의문에 빠진 것 같았다. 성적 맞춰서 진학한 이 학교, 이 학과가 진정 내 길인지, 그래서 전공 공부 외에는 어떤 걸 해야 내가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건지 술자리에서 입을 모아 고민했다. 오죽하면 대2병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우리가 꿈꿨던 어렸을 때의 우리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결국 사기업 취업 준비의 길에 들어선 나는 또 한 번 '꿈'이라는 단어에 숨이 턱 막히게 된다. 아니 글쎄 기업들이 자기소개서 항목에 '5년 후의 꿈, 10년 후 직장에서의 목표와 꿈을 쓰세요'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회사생활이라고는 고작 인턴 몇 개월 해본게 다인 쌩신입들이 도대체 직장 생활에 대해 뭘 안다고 5년 후, 10년 후를 그린단 말인가. 회사를 5년, 10년 다니면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가늠하기 어려웠고, 솔직히 말해서 대기업 사원이 뭐 그리 엄청난 것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아닌가...) 한 번은 모 대기업 임원면접에서 10년 후 자신의 모습은 어떨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다. 정말 수많은 면접 질문들 중 그게 가장 어려웠던 것 같다.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버버 얼버무려 대답하고 보기좋게 탈락했다. 물론 단지 그 대답 때문에 떨어진 것은 아니겠지만서도, 괜시리 억울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질문에 대해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기에 각종 취업 관련 유튜브나 특강에서 "입사 후 목표를 묻는 문항, 이렇게 답하세요!"라고 알려주는 것들을 찾아봤다. 내가 회사에 대해 얼마나 로열티가 있는지를 보는 것이라며 해당 회사와 산업의 성장 방향에 맞추어 개인의 전문성을 높여가겠다는 내용을 적으라고 했다. 하지만... 제가 왜요? 제 목표는 회사와 산업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와는 무관한 것 같습니다만. 우여곡절 끝에 만족스럽게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지금도 5년 후, 10년 후의 꿈을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5년 후에는 작지만 내가 만든 브랜드 하나를 갖고 있는 것, 10년 후에는 행복한 가정과 집이 있는 것? 적고보니 모두 회사와는 무관하다.
어릴 때는 보통 구체적인 직업을 장래희망으로 적어서 내지만, 나이가 들고 현실에 부딪힐수록 딱 하나의 명사로 내 꿈을 표현하기가 어려워지는듯하다. 지금은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것은 없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어떤 어른이 되고 싶다거나 어떻게 늙고 싶다는 삶의 방향을 표현할 형용사와 부사들은 마음 속에 품고있다.
나는 항상 감사할 줄 알고, 내 의견은 명확히 말하되 겸손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또 나이가 들수록 아랫사람들을 살피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이 꿈이자 목표이다. 어린 아이들 역시 명확한 직업 하나도 좋지만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가 꿈이 되면 어떨까. 그럼 성인이 되고 직업에 대한 꿈을 잃어버리더라도 삶의 목표와 가치관은 품고 살아갈 수 있을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