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 끝없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잠잠히 있던 아이가 문득 물어본다.
"음..."
잠시 쉬어있던 머릿속이 바빠진다. 과학 시간에 배운 것들, 40년 평생 습득한 관련 지식들이 순식간에 훅 지나간다. 대답을 해주려던 순간, 잠깐의 침묵을 깨고 아빠가 대답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딸이 많은 곳을 다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라고 넓게 만들어주신 거야."
남편의 존경스러운 현답이었다. 아이의 순수한 질문에 저명한 과학자라면 지질학과 물리학을 설명하며 좀 더 논리적인 답을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목사님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세세히 들려주었을지도. 아니 혹 철학자라면, '정말 세상이 넓다고 생각하니?' 하고 되물으며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를 설명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 '아빠'의 답은 현명했다. 지금 존재하는 너로 인해 이 세상은 넓은 거라고, 세상의 중심은 바로 너라고 이야기해준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주목해주는 아빠의 말에 아이는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우주의 중심은 바로 너란다" (사진 출처 unsplash)
우리 시대에는 자기 자신이 충분히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당연히 여기기 어렵다. 또 얽히고설킨 인생을 헤쳐나가는 자신의 부조리한 모습 자체를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도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직 '초원의 집' 읽는 걸 좋아하는 시기에 다른 누군가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자신이 매우 소중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어야 한다.
즉, 오늘날 부모들의 자녀양육 방식은 절대 응석받이가 아니다. 그것은 현대인이 성인기에 맞닥뜨리게 될 새로운 종류의 가혹함에 맞서 생존하는 데 필요하다고 우리의 직관이 판단한 도구일 뿐이다.
(사랑의 기초 / 알랭 드 보통)
언젠간 신랑에게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이 아플 때 대신 아플 자신이 없어. 그런데 신기하지? 아이들이 아프면, 내가 대신 아프고 싶어. 아이들이 없었으면, 느껴보지 못했을 그런 '사랑'인 것 같아"
정말 그랬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은 신랑뿐 아니라, 과거 어떤 연인에게서도 결코 느껴보지 못했었다. 아이들을 위한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다. 바라는 것 없이 다 퍼줄 수 있는 그런 사랑. 이게 아이들에게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아닐까. 그런 조건 없는 사랑을 먹고 자란 아이는, 가혹한 세상을 마주하더라도 넘어지더라도 아주 주저앉지 않을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글처럼, 자신이 충분히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아이가 되어 아빠, 엄마에게 '세상은 왜 이렇게 넓어?' 하고 묻는다면, 두 분은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까. 날 위해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내게도 말해주실까. 물론 그럴 것이다.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과 공감은 갓 지은 밥 같은 것이다. 잘 지은 밥이 있으면 간장 하나만 가지고도 든든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밥이 기본이라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