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를 하고 있는 내 앞에서 두 아이가 투닥투닥 말다툼을 한다. 항상 그랬듯이 다툼의 발단은 극히 사소한 것이었다. 둘째 아이가 첫째 아이의 말을 따라 하기 시작한 것. 계속 따라 하는 말에 화가 난 첫째가 둘째에게 화를 낸다.
"따라 하지 말라구!!"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둘째 아이가 말한다.
"따라 하지 말라구!"
"따라 하지 마!"라는 말이 고성과 함께 몇 번 더 오간 후, 결국 첫째 아이가 화가 참지 못했는지, 눈시울이 붉어지며 방으로 들어갔다. 설거지도 끝나지 않았고, 바로 쫓아가 둘의 싸움을 정리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대신 철없는 동생이 누나 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다시 돌아온 둘째가 나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쪽지 앞엔 '엄마에게'라고 쓰여있었다.
'엄마가 와주세요.
진짜 빨리 와주세요.
안 그러면 화 안 풀려요'
쪽지를 읽은 나는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당장 아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아이를 꼭 안아줬다. 잠시 가만히 있던 아이가 나를 보며 씩 웃는다. '이제 괜찮아' 하는 표정으로.
내심 놀랐다.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과 화가 쉽게 풀리지 않을 마음의 상태라는 것을 아이는 알고 있었다. 화의 원인이 되는 동생이 자신을 쫓아 뒤따라 들어왔는데도, 동생에게 화풀이를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앉아 쪽지를 쓴 후, 아마 이렇게 얘기했을 거다. '이거 엄마한테 갖다 줘.'
놀라움과 함께 한편으론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자신의 화가 풀릴 수 있게 도와달라는 아이의 말이 너무 고마웠다. '도와달라'는 말 대신 울음을 터뜨리거나, 화를 내거나, 동생에게 화풀이하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이는 정확한 말로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아이가 도와달라는데, 외면하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아이가 한글을 떼고, 숫자를 셈할 때 등등 수없이 많은 칭찬의 말과 박수를 보내줬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담아 아이를 칭찬해주었다.
"엄마는 네가 너무 화가 나서 물건을 던지거나, 쫓아온 동생을 때리거나 하면 어쩌나 사실 걱정했었어. 화를 내기 전에 잘 참아 본 것도 고맙고, 또 엄마한테 화를 풀어달라고 도움을 요청해 준 것 너무너무 고마워. 엄마는 정말 놀랐어. 이렇게 우리 딸이 많이 컸다니.. 정말 고마워."
분노는 불과 같다. 주변의 태울만한 것들을 찾아 쉽게 옮겨 붙는가 하면, 난데없는 곳에 불똥을 튀긴다. (Photo by Paul Bulai on Unsplash)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정확히 읽어내고, 이를 잘 다루기는 사실 쉽지 않다. 특히 '이성적'인 나를 잃어버리는 '분노'의 감정에 휩싸일 때는 더욱 어렵다. 분노는 불과 같다. 주변에 태울 만한 것들을 찾아 쉽게 옮겨 붙거나, 난데없는데 불똥을 튀겨 걷잡을 수 없는 큰 불을 만들어 낸다. '욱'하는 순간을 잘 다루지 못해서, 분노의 칼을 원인이 아닌 내 주변 사람이나, 사물에 돌리는 때가 많다. 그래서 나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폭포처럼 쏟아놓은 가시 돋친 말과 돌이킬 수 없는 행동들로 후회한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하루에도 '욱'하는 일들은 수없이 일어난다. 나의 시간과 아이들의 시간은 다르다. 그래서 재촉하게 되고, 꾸물댄다며 화를 내기도 한다. 엄마와 아이들의 중요한 일들도 다르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집안을 어지럽히고, 엄마는 하루 종일 좇았다니며 청소를 하며 잔소리를 한다. 아이의 'SOS 편지'를 받은 후, 사소한 일에 '욱' 하는 내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화가 나면 아이의 'SOS 편지'를 떠올린다. 꾹꾹 연필을 눌러쓰며 자신의 마음을 돌아본 아이처럼, 나도 욱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쓰며 내 마음을 살핀다. 그렇게 잠시만 지나면, 정말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분노'라는 감정이 발생하고, '이성'의 기능을 관장하는 뇌의 전두엽이 가동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6초라고 한다. 물론 6초 만에 분노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화가 난 후 6초의 시간이 지나면, 좀 더 이성적으로 화를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화가 나면, 잠시 호흡을 내쉬고, 기다려야 한다.
비로소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마주 잡고 '논어' 서너 장을 읽어 내려갔다. 그 소리가 처음에는 목이 막혀서 더듬다가 마침내 화평해졌다. 가슴속에 맹렬히 타올랐던 기운은 거듭 탄식하다가 점차 미약해졌다. 답답했던 기운이 비로소 가라앉고 정신은 맑아지고 생각이 밝아져 씻은 듯 시원했다. 중니(공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 온화하고 기쁜 말과 글의 기운이 나로 하여금 거칠고 추한 마음을 사라지게 만들고 이내 화평에 다다르게 하는가. 부자(공자를 가르치는 존칭)가 아니었다면 내가 거의 발광해 달아나 버렸을 것이다. 전에 한 일을 생각해보니 아득하기가 마치 꿈과 같다. 을유년(1765) 십이월 초칠일에 쓰다.
(문장의 온도 /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고 옮김)
이덕무의 거칠고 추한 마음을 사라지게 한 것은 과연 공자의 글이었을까. 공자의 글에 대한 깨달음도 있었겠지만, 잠시 호흡을 가라앉힌 시간도 한 몫했으리라. '욱' 하는 당신, 잠시 쉬어가자. 이덕무의 글처럼, '욱' 했던 사건, 생각들은 아득한 꿈처럼 멀게 느껴질 것이다. 아, 잊은 것이 있다. 슬프게도 40대가 되면, 뇌의 노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분노를 다스리는 '전두엽' 은 그중 가장 빨리 노화가 되는 부분이라고 한다. 혹 당신이 40대 라면, 더욱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더욱 노오오오오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