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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데어 Sep 22. 2020

일상의 힘

하루키 일상의 여백, 무라카미 하루키

아이들이 잠들고 난 시간, 서늘한 찬 기운에 창문을 닫으며 아이 아빠에게 말했다.


"진짜 가을이 왔나 봐.. 추운걸 보니.."

"왜? 서운해?"

"응... 누군가에게 올여름을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이야. 누구한테 물어내라 할 수도 없고..."


정말 그랬다. 푹푹 찌는 더위보다 코로나 걱정으로 집에 꼭꼭 붙어있던 여름이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으로, 유치원으로 며칠 가는가 했더니, 다시 긴긴 집콕 생활을 시작했다. 금세 끝이 날 줄 알았던 마스크 생활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무심코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옆에 있는 네 살 아이가 "핫!  마스크!" 하며 입으로 손을 가린다. 마스크 씌워주는 것을 깜빡했다. 마스크 없이 밖을 나가는 것은 이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제 세 돌이 지난 아이의 기억 속에 어쩌면 마스크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너무 슬퍼졌다.   


문득 지난 3월 초, 봄을 맞으며 썼던 글이 생각났다.

... 따뜻한 창가 아래 있던 아이가 물어본다.

"엄마, 누가 이겼어?"
"응?"
"오늘... 봄이 이겼어, 겨울이 이겼어?"

겨울의 끝자락과 봄의 시작 사이에서, 겨울과 봄이 서로 싸우는데, 어떤 날은 겨울이 이겨서 춥고, 또 어떤 날은 봄이 이겨서 따뜻하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나 보다.

"음.. 오늘은 봄이 이겼나 봐. 날이 따뜻하다.."
"그럼 이제 조금만 있으면 산책할 수 있겠다!"

아이는 벌써부터 따뜻한 봄 산책에 들떠있다. 유난히 길고 답답했던 이 겨울도 어느새 끝나가고 있다. 따뜻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그 날, 아이들과 나란히 손잡고 산책을 가고 싶다. 이 답답한 마스크는 벗어던지고...


기나긴 겨울 터널을 통과하며 따뜻한 봄을 기다렸었다. 하지만, 어느새 여름이 지나가고, 다시 가을이 돌아왔다. 내게도 코로나 블루가 찾아온 걸까. 너무 허무하게 보내버린 봄, 여름이 아쉽고, 슬프기만 하다. '돌밥돌밥'이라 했던가? 아침을 먹이고 돌아서면 다시 점심을 준비하고, 곧 저녁을 준비한다. 청소를 마치자마자, 다시 꺼내져 나오는 장난감들로 집 안도 어수선하다. 이쯤 하면 외식한 번 할 법도 한데, 아이들과의 외식은 두렵기만 하다. 우울감, 무기력감, 답답함, 분노, 슬픔까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몰려온다.   


전업맘의 코로나 블루일까? 이 부정적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결론은 '일상'을 더욱 꽉 붙들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여행, 외식 등 코로나 19로 우리의 일상탈출이 불가능한 지금, 그래서 코로나 블루에 허우적대는 상황에서, 오히려 일상을 더욱 꽉 붙들라니... 모순적이지 않냐며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상'에는 지금까지의 나를 만들고, 지탱해준 힘이 있다. 화려하고, 자극 많은 이벤트 속에서의 내가 아닌, 일상의 진짜 '나'로 돌아오는 순간 진정한 '편안함'을 느끼지 않았던가. 오랫동안 차곡차곡 다져진, 그래서 단단한 일상에 발을 딛고 있어야 내 마음은, 그리고 내 삶은 평안할 수 있다. 소용돌이치며 변화하는 사람들 속에서 빠져나와, 가면을 벗고 진짜 나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일상이다.


아이들과 아침 인사를 하고, 커튼을 걷는다. 환한 햇살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방안을 비춘다. 창을 열어 밤새 퀴퀴해진 공기를 내보낸다. 아이들의 세상에 '예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눈을 뜸과 동시에 놀잇감을 찾아 나선다. 아침을 차려 먹이고, 틈틈이 식어가는 커피를 마신다. 짧은 호흡의 읽을거리를 찾아 잠시 읽어내고 나면, 전업맘의 일은 시작된다. 집을 치우고, 빨래를 하고...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 밤이 찾아오면,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 아이들이 기절하듯 곯아떨어진다. 다시 집안에 평안이 찾아온다. 감사의 시간이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음을, 오늘의 일상도 깨지지 않고 잘 다져졌음을 감사한다.


하지만 글을 쓸 때도 그렇지만, 사람이 언제나 컨디션이 좋을 순 없다. 오랫동안 뭔가를 계속하자면 산도 만나고 골짜기도 만나는 법이다. 컨디션이 나쁠 때는 나쁜 대로 자신의 페이스를 냉정하고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범위 안에서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나가는 것도 중요한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무리하지 않고, 고개를 치켜들고 꾸준히 참고해나간다면, 다시 조금씩 컨디션이 되돌아오는 법이니까.

(하루키 일상의 여백, 무라카미 하루키)



현관문을 나설 때 마스크를 찾지 않아도 되는 그때가 오면, 오늘의 일상이 참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될 거라 믿는다. 아침에 눈뜨고, 저녁까지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키며 서로 뒤엉켜 보냈던 2020년의 일상을 말이다. 하루키처럼 나도 일상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 조금씩 조금씩 이 긴 터널이 끝나가길 기대하며... 봄이 지나고,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지나는 동안 단단하게 다져진 일상을 딛고 세상 밖으로 힘차게 나가는 아이들의, 그리고 나의 그 날을 꿈꿔본다. 오늘도 하루가 시작된다.  




Photo by Manikandan Annamalai , Anne Nygård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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