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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데어 Jan 09. 2020

온전히 나를 마주한다는 것은.

사람 풍경, 김형경

조용히 학습지를 풀고 있던 첫째 아이가 엄마를 부른다.


"엄마, 이거 이상해."


문제를 보니 네모에 알맞은 글을 찾는 문제다.


[ 동생이 장난감을 망가뜨리면 ㅁㅁㅁ. ]


"'슬퍼요'가 없어. 답이 없어.."


내가 본 문제지에는 분명 '화나요'라는 답이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답을 찾지 못한다.


"맞아. 동생이 장난감을 망가뜨리면 슬프지. 근데 화도 나지 않을까?"


하고 이해시켜주었지만, 뭔가 찝찝한 여운이 남았다. 아이가 너무 착해서 그런가? 하지만, 제 때 '분노'하지 못하는 아이의 마음이 안쓰러웠다. 자신의 것을 꽉 움켜쥐지 못하는 여린 마음이 안타까웠다.

감정은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사랑=좋은 것, 분노=나쁜 것?

아이를 대하다 보면, 문득문득 내 모습을 발견하는 때가 있다. 이번에도 그랬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었다. 화가 나도 꾹꾹 마음속에 눌러 담았고, '사랑=좋은 것, 분노=나쁜 것'이라는 공식을 무의식적, 의식적으로 이상화했다. 어쩌면, 언젠가 아이는 분노를 표출하는 자신을 향해, 일단 조용히 하라고 다그치던 엄마를 만났는지도 모른다. 미안했다. 아이는 아빠, 엄마를 보며 세상을 배우고, 마음을 배우는데, 역시나 엄마는 부족했다.


 분노는 사랑처럼 누구에게나 있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감정이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비정상적인 상태라고 한다. 사랑이 생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듯, 사랑의 뒷면인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삶의 질이 좌우된다고 한다.

(사람 풍경, 김형경)


초판이 출간된 지 십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꺼내어 읽을 때마다 곱씹는 글귀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이 생의 모든 문제의 근원인 것처럼, 사랑을 받지 못해서, 사랑을 하지 못해서 생기는 '분노' 역시 생의 모든 문제에 걸쳐 표출된다. 그만큼 '분노'를 다루는 문제가 생의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억눌렸던 감정들은 언젠가 '툭'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졸업 후, 여러 번의 '입사 탈락' 메일을 받은 후, 눈높이를 낮추어 지원한 한 회사에 취업이 되었다. 청년 실업률 최악이라는 공포심 때문에 '실업자' 보다는 '취업자'를 택한 결과였다.  2호선 콩나물시루 같은 전철을 타고 아침 일찍 출근, 거의 매일 새벽까지  야근을 하고 돌아왔다. '졸업 준비' 이유로 연예도 멀리한 상태였다. 어느 약속 없던 토요일 오후, 책상 밑 꼬일 대로 꼬여버린 전기 코드 선들을 정리하다 갑자기 화가 나며 눈물이 났다. 갑작스러운 눈물이 당황스러웠다. 고작 엉켜있는 이 선들 때문에 내가 울었다니... 그리고 깨달았다. 그 분노는 엉켜있는 코드가 아닌 엉켜있는 내 삶에 대한 분노였다. 꾸역꾸역 출근을 하고, 질질 끌려오듯 퇴근을 하는 모습은 상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괜찮은 듯했지만,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외면해 오던 분노와 실망감이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와버렸고, 그 일로부터 얼마 후, 나는 퇴직을 선택했다. 그때의 결정이 잘한 결정이었는지, 실수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내 안의 감정을 좀 더 살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도 모르게 쌓여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결코 조용히 사라지지 않으며, 어느 순간, 어떤 형태로든 표출된다는 것을 배웠다.  


온전히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것은..

그리고 엄마가 되었다. 아이들이 좀 더 자신의 감정을 좀 더 솔직하게 바라보고 포용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 아이들의 감정을 좀 더 주의 깊게 들여다보려 노력한다. 아이의 속에 있는 기쁨, 편안함, 안정감 같은 긍정적인 마음뿐 아니라, 시기, 질투, 분노, 미움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한다.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마주하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줄 아는 것과도 같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엄마의 가장 큰 선물은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나'와 '너'를 사랑하는 법 말이다.  


감정의 파도 속에서 건강하게 빠져나오는 방법은 그 감정의 파도 안에서 나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다.


서퍼들이 큰 파도를 만나면, 서프보드에서 떨어져 파도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초보 서퍼라면, 자신을 휘감고 있는 파도에 당황해하며 빨리 수면 위로 나가기 위해 애를 써서 오히려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숙련된 서퍼들의 경우, 자연스럽게 파도의 힘에 몸을 맡기고 몸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파도 속에서 눈을 떠서 수면 위에 위험한 서프보드나, 다른 서퍼가 없는지 등을 판단하고 물 위로 떠오른다. 우리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당황함이 앞서 무조건 억누르거나, 그 감정에서 서둘러서 빠져나오기 위해 애를 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그 감정에서 건강하게 빠져나오는 방법은 그 감정의 파도 안에서 나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화가 나있는지, 내가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Discomfort is the entry price of admission to a meaningful life"

("'불안'은 좀 더 의미 있는 삶으로 가기 위한 입장료 같은 것이다")

 - 심리학자 수잔 데이비드(Susan David)


'Discomfort'(불안)를 'Anger'(분노) 나 'Sadness'(슬픔)으로 바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은 나를 더 나은 나로 이끄는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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