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 마을엔 박 씨 아저씨가 산다. 몇 해 전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치고 난 후 모난 성격은 더 비뚤어졌다. 박 씨가 원래부터 성격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동네 사람들은 말한다. "학교 다닐 때는 얼마나 효자였냐! 공부도 잘하고..."그러던 박 씨가 성격이 변한 건 이혼 후부터였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한 박 씨는 서울의 변두리에서 조그마한 문방구점을 차렸다. 이쁜 마누라도 얻고 아이도 남매를 얻었다. 모든 게 순탄하기만 했다. 인생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만 박 씨에게는 가끔씩 가는 동창회에서 보는 친구들의 잘 나감이 부러웠다. 말쑥한 양복차림에 군살 없는 몸매와 현란한 경제용어를 동원한 지적인 말투 등에서 박 씨는 왠지 자신이 위축되고 있음을 알았고, 그들이 못내 부러웠다. 박 씨도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가세가 기울고 인생의 포인트를 다르게 잡아 가게 일을 하다 보니 나이도 친구들도 보다 배나 들어 보이고 하루 종일 매장에 앉아 운동이라곤 해본 적이 없다 보니 날렵했던 몸매는 뚱뚱해져만 갔다. 박 씨가 시골로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동네 사람들은 평범한 성격의 사람들이 많지가 않았다. 하루벌이로 날품을 파는 사는 이가 많았고 빈둥거리면 노는 이도 적지 않아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밤낮으로 돈벌이 문제로 부부싸움이 이 집 저 집에서 번갈아가며 바람 잘날 없는 것처럼 이어졌다. 특히 온순해 보이던 사람들이 술이라도 한잔 들어가면 무슨 배짱인지 술주정이 돼 정치를 욕하고 전봇대를 욕하고 신호등을 욕하는 등 온갖 사회 시스템에 삿대질을 해댔다. 박 씨가 운영하는 문구점 주변에 초등학교 하나와 고등학교가 하나가 있어 제법 돈벌이되어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꽤 통장에 잔고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IMF 이후 대출이자와 임대료가 급상승하면서 모든 것이 만만치 않게 되었다. 더욱이 목이 좋은 곳에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전문 문구점이 새롭게 들어서는 바람에 박 씨의 문구점 판매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이젠 매달 내던 임대료를 차일피일 미루는 실정이 됐다. 상품을 대주는 유통업체의 마진 축소로 한 참 울상이던 박 씨는 옆집 김씨네 청과가 부러워졌다. 아침 일찍 청과도매시장에서 들여오는 싱싱한 채소와 과일류들도 탐스럽고 청과상회 주인의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어릴 적 직접 키워보기도 했던 채소와 과일이라 남모를 자신감도 속도를 더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문구점을 접고 청과상회를 하고자 하는 욕구가 어느 날인가부터 오기가 되어 맘을 온통 심란하게 했다. 더구나 청과물 상회는 아직 대기업이 진출하지 않은 곳이었다. 업종을 바꿔볼까? 그러나 금리가 크게 오르고 대출심사도 강화돼 추가로 은행돈을 빌리긴 여의치가 않았다. 하여 안양과 수원에 사는 누님과 여동생 집에서 자금을 융통받아 결국 청과상회를 인수해 운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꿈이었을까 청과점 운영이 꿈이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문구점과는 다르게 청과물이라는 것이 매일매일 가격 변동 폭이 극심했고 비슷비슷할 것만 같았던 청과류 품질도 사뭇 달랐다. 더욱이 시간대별로 가격차이가 이만저만 나는 게 아니었다. 어느 날인 가는 너무 비싼 값에 물건을 들여오기도 해 시간이 지날수록 동네 사람들의 발길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동네 입구 사거리엔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형마트가 들어섰고, 박 씨 가게는 어느 달부터인가 외상으로 물건을 들여오기 시작하여 급기야는 은행으로부터 이자 납부를 독촉받는 상황을 맞았다. 나쁜 일은 쌍으로 터진다고 여우 같은 와이프는 갈수록 표독스러워졌고 사춘기를 맞은 아이들도 아버지와 담을 쌓고 지내는 형국이 됐다. 결국 와이프가 집을 나가고 사채업자들로부터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박 씨는 야반도주를 결행했다. 어린 남자아이 하나를 데리고 어린 시절 친구들과 소꿉놀이하던 그 고향 시골로 줄행랑을 쳤다. 박 씨의 시골생활은 무료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골에 내려와서도 뚜렷이 할 일이 없었다. 도시생활에 적응된 몸은 고단한 시골생활을 쉽게 허락하지도 않았다. 자신감도 예전에 비한다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젠 힘들고 고단한 일은 그이의 노모가 칠순 도맡다 하다시피 했다. 마누라가 없는 가정생활은 퍽퍽하기가 그지없었고 마음만 심란했던 박 씨는 읍내 다방과 술집을 전전하며 어머니가 모아 놓은 돈을 한 푼 두 푼 가져다 쓰기 시작했다. 함께 내려온 남자아이는 중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박 씨가 해야 할 집안일을 맡아하는 것 같았다. 돼지 사료 주기, 돼지우리 청소 하기 등등 어떤 이들은 그 남자아이가 박 씨의 아이가 아니라고들 했다. 박 씨가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어머니가 동네 끝자락으로 분가해 나가면서 동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이어지자 박 씨는 나름 열심인 척 농사일에 매달리기도 했다. 옆집 밭까지 임대하여 대단위로 생강을 심었는데 그것이 대박 났다. 생강 값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인생의 또 다른 변곡점인 듯 그동안 열심인 척 보여주기 위해 삼가했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어느 날 생강업자와 읍내에서 코가 비뚤어지게 마신 박 씨는 시골 터미널에 주차시켜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다 공사 중이던 교량의 우회 신호를 보지 못하고 교량을 뛰어넘어 수로에 차량이 고꾸라지듯 박혀 버렸다. 이 사고로 박 씨는 겨우 목숨을 건지기는 했으나 다리를 쓸 수가 없게 됐다. 몸을 마음먹은 대로 쓰지 못하니 정신적인 후유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모든 게 보기 싫고 아니꼬운 듯 보였다. 자기 집 마당을 통과해 옆집으로 다니던 돼지사료 배달차량도 그렇게 꼴불견이 아닐 수가 없었다. 박 씨는 어느 날 업자를 불러 마당 한가운데에 돌덩이를 쌓아놓고 가운데에 흙을 부어 화단을 조성했다. 뜬금없는 화단 조성에 말들이 많았으나 박 씨는 괘념치 않았다. 그렇다고 박 씨의 불안증세가 사라지진 않았다. 더욱이 그동안 군말 없이 자기 말을 들어주던 아들도 도벽이 생겼는지 집안의 돈들이 야금야금 사라져 갔다. 이웃집에서도 도둑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내가 무엇을 잘 못했느냐 말이다” 박 씨는 급기야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러고 보면 삶을 살아내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보편적인 선택을 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삶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보듬어주고 나누어 주고 중요한 순간에는 반드시 밸런스 있는 힘을 가지고 선택을 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