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사람도, 처연한 눈으로 앞을 응시하는 사람도, 입가에 미소를 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렸다면 생각해 보라. 이 소중하고 감싸주어야 할 사람을 단 며칠이라도 잊을 여유가 되는지. 단 2박 3일만이라도 이 사람이 아닌 나만을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는지.
그다음은 고개를 움직여 가까운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라. 거울의 크기는 작아도, 커도, 직사각형이라도, 동그란 모양이어도 상관없다. 거기에 비친 나라는 사람이 중요하니까. 이때 자신의 모습에서 무언가 부족해 보이는가? 자유가 결핍되어 보이는가? 혹은 내가 원하는 모습과는 다른 내가 거울 속을 채우고 있는가?
단 며칠이라도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다면,
거울 속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면,
당신은 혼자 여행을 떠나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 차례 -
01. 번아웃, 아웃
02. 번아웃뿐만 아니라, 미혼 여성
03. 추가 여행 정보(준비물, 공항)
01. 번아웃, 아웃
여기 한국의 작은 한 동네에 김연경이라는 여자가 있다. 나는 가끔 '내가 뭐라고, 내가 뭐가 된다고'라며 주목받지 못한 슬픔을 현실적인 말로 달래고, 자신을 객관화한다. 일이 하수구가 막힌 것처럼 답답할 때도 책상 앞에서 끙끙대며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 프리랜서 번역가다. 업무가 쌓일 때는 무사히 끝날 때까지 걱정하고, 업무가 잠시라도 없을 때는 자신의 노력 부족을 탓하며 주목받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아 자신을 홍보하며 일감을 낚아채러 다닌다. 꽤 힘겨울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우리 어머니가 하는 말마따나 남의 돈 벌어먹기 쉽지 않고, 요즘 세상에 바쁘지 않은 사람은 없고, 프리랜서에게 일이 많다는 건 어찌 보면 좋은 일 아닌가.
일만 하면서 시간이 꽤 흘렀고, 그날도 네모나고 밝은 모니터 화면 속의 일본어를 번역하고 있었다. 두 달, 아니, 정확하게 몇 달일까? 기억나지 않는 몇 달 동안 쉬는 날 없이 종일 번역을 하고 있었다. 어둡고 짙은 안개가 낀 길에서 힘없는 발을 질질 끌며 걷는 기분이었다. 일주일이라도 쉬고 싶은데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았다. 중간중간 시간을 짜내서 반나절 혹은 하루를 쉬어봤지만 내 눈밑에 내려온 다크서클과 등에 내려앉은 누적된 피로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잠을 푹 자도 피로가 말끔하게 풀리지 않았고, 동네에서 외식을 하고 와도 배만 채워질 뿐 마음은 금방 허기졌다. 이런 증상은 처음이었다. 무겁고 짙은 안개를 걷어낼 돌파구를 갈구했다.
그때부터였다.
자유롭게 도쿄 여행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한 건.
번역하느라 키보드 위 손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머릿속에는 맑은 날씨에 도쿄에서 여행하는 내가 가득 차곤 했다. 일본의 다른 주요 도시인 오사카, 후쿠오카는 자주 발걸음했기에 나름대로 안다고 자부했지만, 태어나 두 번만 방문한 도쿄는 아직 내게 미지의 도시였다. 미지의 도시지만 확신했다. 천사백만 명이 숨 쉬고 있는 도쿄에는 많은 인사이트와 힐링 스폿이 있다고.
2019년. 몇 달 뒤 코로나가 세상을 덮칠 줄도 모르고 도쿄의 명소를 쏘다녔다. 이때 이후 단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일이 바빠 도쿄 여행은 실현되지 못한 채 머릿속에 상상만 꽉 찼고, 대리만족이라도 할 심산으로 유튜브에서 도쿄, 도쿄 근교 여행 영상을 보거나 인스타그램에서 일본 도쿄에서 유행하는 곳, 축제, 심지어 날씨 정보까지 챙겨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더는 여행을 미뤄선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순간 옆에 있던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초라한 모습.
나는 검은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김연경, 너는 떠날 때다.
월요일까지 바쁠 테고 다다음주에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니 여행을 가려면 화요일부터 금요일 사이가 적당하다. 이래저래 다른 일정을 빼면 나에게 허락된 시간은 이박 삼일. 일이 얼추 마무리되자마자 항공사 홈페이지에서 삼일 뒤 비행기표의 결제 버튼을 눌러버렸다. 이렇게 급박하게,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비행기표를 산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저 자유롭게 쉬고 싶었고, 그러려면 여행 장소로는 일본이지만 익숙하지 않은 도쿄가 적당하다고 믿었다. 최소한의 짐만 챙겨 도쿄를 호젓하게 거닐며 번아웃으로 케케묵은 서랍장처럼 닫힌 마음을 새롭게 만들고 싶었다.
2박 3일간 부담 없이 떠나는 도쿄 여행. 소중한 시간을 고스란히 고생한 나에게 바칠 수 있는 자유를 찾는 여행. 이 얼마나 끝없는 가뭄 이후 내리는 단비만큼 소중한 시간인가.그리고 실제로 이박삼일의짤막한 도쿄 여행을 하며, 비록 긴 시간 있지는 못했지만 짧은 여행으로도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 여유와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브런치 북에는 나처럼 다른 사람도 바로 부담 없이 도쿄 여행을 계획할 수 있도록 여행 전 챙겨야 할 준비물, 각 구역의 가볼 만한 명소를 정리했다. 그리고 여행이 선사한 자유에 나의 생각을 살포시 접목하여 에세이를 작성했다. 브런치뿐만 아니라 네이버 블로그에도 정보를 자세히 적어두었으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도쿄 여행 이야기가 당신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02. 번아웃뿐만 아니라, 미혼 여성
가을이 불쑥 다가온 주말, 컴퓨터 창을 켜서 이 여행 에세이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하고픈 말은 많고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한줄기 빛처럼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보여준 도쿄를 유려하게 소개하고 싶지만, 활자로 표현하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어떠한 마음이 일어서 여행 에세이를 집필하기 시작했는지 이 프롤로그에서 다뤄도 좋을 것 같다.
한번 이야기해 보겠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화상 회의 플랫폼 줌에서 진행된 글쓰기 강의였다. 그녀는 손수 에세이를 써서 출판했기에 강연 때도 에세이에 포함된 그녀의 성장 과정과 인생관을 드문드문 들을 수 있었다. 외모, 말투 등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그녀는 자신을 사람들이 정한 표준대로 맞춰서 살아온 사람이라고 칭했다. 사람들이 정한 표준. 여자의 경우 크게 나누면 직장, 결혼, 출산이 있는데, 그녀는 그 사회적 기준을 이십 대에 성실하게 지켜왔고 어찌 보면 완벽하게까지 보이는 인생 커리어를 지녔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의 규격에 맞추려다가 답답함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정답이 없기에 결코 맞고 그름을 말할 순 없지만 사회적인 기준을 잣대로 들이댄다면 나와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삼십 대 여자다. 비혼주의자는 아니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이 지구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엄마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깜찍한 아이도 좋아하지만 출산하지 않았다. 대기업을 몇 년 다니다가 그만둔 후 현재는 프리랜서 일본어 번역가로 살고 있다. 사회적 기준이라는 형체 없는 기분 나쁜 것을 나에게 들이민다면 나는 20대에 이룬 일이 별로 없는 인생의 '지각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비록 평범한 대학교였지만 이과 쪽을 선호하시던 무서운 부모님의 말을 어기고 일본어와 중국어를 전공했다. 대기업에 들어가기 전 여러 직장에 발붙이지 못해 선 밖의 사람처럼 여겨졌고, 종종 실수했고, 잘못했고, 복잡한 인간관계가 발목을 잡았지만 내 딴에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는, 혹은 답답함이 목까지 차올라 미쳐버릴 것 같을 때는 안정적인 직장도 한치의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 멋대로 맞다고 판단한 일에 목말라하고 매달리는 모습에 대단하다고 손뼉 쳐준 사람은 있어도 모범생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애초에 그녀는 스물아홉에 출산이라는 성스러운 경험을 하였고, 나는 스물아홉에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 번역가라는 영역에 둥지를 틀기 위해 모든 정신을 집중했으니 서로의 눈앞과 머릿속에 펼쳐진 드넓은 풍경은 다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아마 서로가 기쁨을 느낀 순간이 꽤 다를지도 모른다. 나는 이십 대 때 죽어도 경험하지 못한 인생의 행복한 고찰과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삼십 대에 혼자가 되고 나서야 경험했는데, 그녀는 다를 수도...
나와 참 달랐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호기심이 피어났고 흥미를 느꼈다. 강연 때 똑 부러지는 말투에서 쉬이 부러지지 않을 단단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가 발매한 책까지 거쳐온 길이 사뭇 다른 내가 공감할 수 있을까? 이러한 걱정이 무색하게 난 책 첫 장부터 한 손으로는 책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는 너무나 놀라운 경험이었다. 나와 달라도 진심은 와닿았다.
우리는 각자 처한 상황이 달라도 충분히 상대에게 공감할 수 있다. 상대의 갑작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행동, 각성, 또는 가슴속에 뒤죽박죽으로 덮어두었던 내밀한 슬픈 이야기도 받아들일 준비가 된 포용심이 넓은 사람은 많다. 누구도 삶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정확히 알지 못하며, 행복해지는 길은 이토록 어려우며, 행복과 정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다가 오히려 넘어져버린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니까 말이다.
인생의 지각생인 나의 이야기 또한 보아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용기가 생겼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정보가, 힐링이, 행복이, 위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음에 피어오른 자그마한 불씨는 최근에 나에게 행복을 선사한 도쿄 여행과 뒤섞였고, 여행 에세이를 더듬더듬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머니는 딸이 혼자서 도쿄에 간다고 하자 여행하기 전, 여행하며 들린 카페 안에서까지 전화와 메시지로 혼자 놀러 가는 게 뭐가 재미있냐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셨다.
어머니가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신 지 너무 오래되셨나 보다.
혼여(혼자 여행)도 얼마나 꿀잼인데.
인생의 지각생인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어, 번아웃과 사회적 잣대를 잠시 내려두고 새하얀 구름을 너머 일본 도쿄로 향했다. 나만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