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에노 공원. - 차례 -
01.도쿄에서 예민함과 이별하다
02.빛과 자유
03.추가 여행 정보(우에노 공원 국립 서양 미술관)
01. 도쿄에서 예민함과 이별하다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지만 금쪽이를 보고 오열하는 사람, 여기 있어요.
앞서 프롤로그에도 썼듯이, '우리는 각자 처한 상황이 달라도 충분히 상대에게 공감할 수 있다.' 그러니 미혼인 나도 육아 프로그램에 공감할 수 있다.
풍성한 파마머리를 하고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라고 야무지게 말해주는 오은영 박사님을 참 좋아해 이윽고 육아 프로그램 <금쪽같은 내 새끼>까지 보기 시작한 게 어언 1년 전이다.
'금쪽이'의 '금' 부분에 이름을 넣어 말썽꾸러기처럼 구는 사람에게도 쓸 정도로(예를 들면 '연경이'인 나는 연쪽이) 널리 알려진 말 '금쪽이'.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면 운전하는 엄마에게 별안간 떼를 쓰고 도가 지나칠 때는 때리기까지 하는 금쪽이, 한 번 울음이 터지면 울면서 동네 사람 다 들으라는 듯 빼액 소리를 몇 시간 동안 지르는 금쪽이 등 자극적이기 그지없는 아이들이 나오지만, 방송 후반에 금쪽이들이 코끼리 캐릭터에게 털어놓는 진심을 들어보면 천방지축인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부모에게 쏠려 있을 때가 대부분인지라 아이의 마음을 몰라줬다는 생각에 부모들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미혼 여성이자 육아를 해보지 않은 나는 프로그램을 보고 어떤 생각에 잠겼을까? 먼저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둘째, 육아하는 부모들을 마음을 다해 존경하게 되었다. 셋째, 금쪽이를 보고 어린 시절을 곱씹으며, 내가 어릴 적부터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30대가 된 후 육아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야 옛날부터 예민한 기질이 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성향을 이렇게나 몰랐다.
무슨 뜻인지 설명을 조금만 덧붙여 보겠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세기의 발레리나 김주원이 '자신은 어릴 적 예민한 금쪽이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성격이 예민했고, 이러한 예민함을 무용에 적용해 조금만 동작이 흐트러지면 섬세하게 하나하나 맞춰나갔다고 한다. 발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사인 그녀와 난 결코 비슷한 대상이 될 순 없지만, 예민한 성격만을 두고 봤을 때는 비슷한 결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우에노 공원. 전체 이름은 '上野恩賜公園(우에노 은사 공원)'. 벤케이 라멘에서 식사를 마치고 아사쿠사에서 가까운 우에노 공원에 도착한 나는, 공원에서 떼를 쓰는 아이를 보며 문득 예민한 금쪽이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의 예민함이 어떠한지 고찰했다.
당신은 예민한가? 나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몸과 정신 모두 예민하다. 식사하는 자리에서 왠지 싫은 음식은 맛있다고 해도 손을 대지 않는다. 차를 운전하면서 옆에 사람이 앉아 있을 때 음악 소리가 조금만 커도 집중하지 못한다(하지만 우습게도 혼자 있을 때는 소리를 한껏 올려도 긴장하지 않고 운전한다! 사람이 있으면 예민한 건가).
옆 사람은 낮은 데시벨로 반응할 일에도 소스라치게 놀라서 소리를 빽 지른다. 나에게 향기로운 냄새가 나지 않는 것 같으면 향수를 뿌려야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빈도수는 잦은 편이다. 여성이 한 달에 한 번씩 겪는 '그날'이 오면 심한 생리통 때문에 어딘가 고장 난 로봇처럼 뒤뚱거리고 예민해진다. 피부에 로션 하나만 잘못 발라도, 음식 하나만 잘못 먹어도 피부가 뒤집힌다. 해야 할 일이 많은 날에는 늘 소화가 잘되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예민한지 글로 쓰니 직접 자기 비밀을 속속들이 들추어내는 기분이 들어서 창피하다. 부끄러울 만도 한 게, 세상에서 예민한 사람은 민폐 덩어리, 특이한 사람 취급받을 때가 많고 정반대인 쿨한 성격은 '쿨(cool)'이라는 영어의 뜻답게 뒤끝 없는 시원시원함으로 사랑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는 쿨한 척하려고 무던히 애썼다. 친구에게 상처받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에 고민 따위 없는 척, 그게 내 모습인 척 행동하고 다녔다. 내가 원하는 쿨한 모습을 꾸며내자 진짜 내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관대한 성격이라며 친구에게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실제로는 나 자신에게도 관대하지 못하고 채찍질해대는 성격이면서 개뿔, 겉으로는 쿨한 척하며 애먼 가까운 사람들에게 삐죽삐죽하게 굴었던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예민한 '연쪽이(연경이+금쪽이)'일뿐이었다!
단, 혼자서 해외 여행할 때는 예민함이 사라졌다. 항상 보아 눈에 익은 한국어가 없고 길을 걷거나 기차를 타면 보이는 아파트, 차, 심지어 음료수 하나마저 한국과 다른 곳에 내던져지니 생존 본능이 생겼다. 예민하고 자시고 간에 일단 여기서 살아남아 알차게 여행해야 했다.
여행을 무사히 끝내기를 기도하며 예민함 따위는 잊었고, 쫄깃한 긴장감과 설렘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재료를 차곡차곡 쌓고 달콤 짭짤한 소스를 뿌려 완성하는 히로시마식 오코노미야키처럼 혹여나 여행하다 허탕을 쳐도 바로 또 다른 명소와 맛집을 가거나 인생 최고의 사진을 찍으며 좋은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서 행복한 여행을 완성했다.
02.빛과 자유
일본 여행은 익숙하지만 도쿄 여행은 겨우 세 번째인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9월. 땡볕이 내리쬐고 양산을 써도 땀이 뚝 떨어지던 그날, 우에노 공원에 있는 우에노노모리 미술관에서는 외국인이 티켓을 구하기 어려웠고 도쿄도 미술관과 다른 한 곳은 휴관하는 바람에 드넓은 우에노 공원에서 갈 곳을 잃고 덩그러니 서 있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자 '역대급 허탕'이라는 문장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그래도 괜찮다. 우에노 공원에는 가려던 곳이 휴관이더라도 다른 선택지가 많으니까.
우에노 공원은 일본 도심 속에 널찍하게 위치한 명실상부 도쿄를 대표하는 공원이다. 우에노 공원은 계절에 따라, 필요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뽐낸다. 봄에는 우에노 공원에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알려진 소메이요시노(왕벚나무)가 파스텔 톤 핑크색으로 가득 찬 공원을 선물하고, 내가 방문한 여름 끝자락에는 녹음이 우거진 초록빛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너무 넓어 끝이 보이지 않는 우에노 공원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깔끔한 건물이 하나 나오는데, 여기가 바로 나의 새로운 여행지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이다.
건물 앞에 흑색으로 반짝이는 칼레의 시민 동상이 보였다. 죽음을 향해 공포에 떨며 나아가는 여섯 명의 진짜 영웅들을 표현한 동상. 목숨을 건 사람들의 동상이 미술관 앞에 세워져 있으니 미술관 안에서도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작업한 예술가의 혼을 절실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은 동상 하나하나를 톺아보고 싶었지만, 결국 무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시원한 미술관으로 곧장 뛰어갔다.
도쿄 국립서양미술관 정문 쪽. 국립서양미술관은 서양 미술 컬렉션을 수집하는 데 일생과 재산을 바친 마쓰카타 고지로(松方幸次郎)가 모은 미술품을 토대로 설립되었다. 마쓰카타 고지로 외에도 많은 컬렉터의 기증으로 풍성하게 서양 미술을 만끽할 수 있는 이곳의 상설전 입장료는 단돈 500엔. 가성비를 뛰어넘는 '갓성비' 예술 탐방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1층에 들어섰다.
차분한 나무색과 따뜻한 조명으로 꾸며진 전시실은 1층에 동상이 놓여 있고,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내로라하는 유럽의 미술 작품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진다. 작품을 보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 두어 명 모여 작품을 보며 감상을 말하는 사람, 관내가 넓어 관람객을 배려해 비치한 의자에 앉아 쉬는 사람, 작품을 보호하고 관람객을 돕기 위해 여기저기 배치된 단정한 검은색 옷을 입은 직원들... 평일임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이 국립서양미술관에 있었다.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고 결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작품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든 유디트>, 종교적인 색채가 돋보이는 <봉납제단화 성삼위일체, 성모, 성요한과 성화기증자>, 동경의 땅이었던 이탈리아 나폴리에 있는 짙은 색감의 나무와 불어오는 바람을 마음껏 즐기는 듯한 두 사람을 그려낸 <나폴리의 추억>... 작품 앞에 서 있으니 그림이 지닌 아름답고 신묘한 매력에 쑥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접하자마자 입술 끝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온 내가 사랑한 작품은 따로 있었다. 화가 '클로드 모네'의 그림이었다.
클로드 모네 <세느강의 아침> 나에게 클로드 모네의 작품은 뽀빠이가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샘솟는 것처럼 무조건 마음을 치유해 주는 시금치, 즉 치트키와 같은 존재다. 일정한 형태 없이 흐릿한 붓 터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양한 색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추상적이지만 마음에 감동이 정확하게 꽂힌다. 그림에 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한 나지만, 보았을 때 마음속에 새로운 두근거림이 피어나고 심신이 안정되는 것이 뛰어난 작품이라면 나에게는 클로드 모네의 그림이 최고로 뛰어난 예술이 아닐까 싶다.
클로드 모네처럼 물체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고, 형태보다는 빛에 따라 색채를 표현하는 미술 기법을 '인상주의'라고 한다. 똑같은 나뭇잎이라도 지금은 초록빛이지만 시간이 흘러 빛이 다르게 비추면 노란색에 가까워 보일 수 있다. 이러한 색채의 미묘한 변화를 포착해서 표현했다.
빛과 클로드 모네는 떼놓을 수 없다. '그리다 만 것 같다'라며 자신의 그림이 비웃음을 사던 때부터 빛이 자아낸 다양한 모습을 그렸다. 나중에는 하나의 주제로 시간에 따라(빛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여러 장 그려내기까지 했다.
빛이 비치는 한 항상 똑같은 풍경은 없다.
이를 알게 된 순간, 머릿속에 정신없이 얽혀 있던 생각 중의 하나가 스르륵 풀리며 깨달았다.
대자연이 선사한 풍경조차 빛이 어떻게 비추느냐에 따라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데, 나도 자신의 예민함을 다른 시각으로 비추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풍경을 비추는 빛처럼 예민함도 어디에 빛을 비추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
마음속 어딘가에 고립시켜놓고 헐레벌떡 숨기기 바빴던 예민함, 그럼에도 나와 함께 공존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던 예민함을 토닥거리고 보듬어주면 어떨까? 예민함을 다르게 비추면 감성적이며 예술적인 성격이 되고, 또 다른 방향으로 비추면 타인의 작은 감정의 흔들림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공감할 수 있는 성격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도쿄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보름쯤 되었을 때 해운대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회색빛 거리에 우수수 떨어진 낙엽들이 보였다. 그러다가 네모나고 깔끔하게 조경해 놓은 푸른 풀에 눈이 갔다. 사각형 모양으로 조경된 풀 위로 갈색 낙엽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저 푸른 풀은 낙엽이 위를 덮어줘서 겨울에도 따뜻하겠네.'
사물에까지 과몰입하고 있으니 문득 나를 자주 과몰입하게 만드는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저녁에 잠자지 못할까 봐 커피를 안 마시는데 어제 실수로 마셨어. 엄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안 좋았을지도 몰라. 잠은 잘 잤을까?'
엄마에게 연락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요즘 자주 하던 고민이 떠올라 예민해졌다. 사실 '옷이 피부에 닿는 느낌이 마음에 안 든다' 수준의 고민이었다. 그야말로 고민이라기보다는 괜히 예민해져서 과하게 반응한 것뿐이었다.
나는 창밖의 고요한 가을 풍경을 다시 바라보고는 '아이고, 나의 예민함이 이번에는 거기에 꽂혔구나'라고 생각하며 웃음 짓고 넘겨버렸다. 이제는 예전만큼 예민함에 휘둘려 스트레스받거나 날카로워지지 않는다. 나의 뾰족한 부분은 직접 보듬어 다시 둥그스름해지도록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불현듯 불안해지거나 안 좋은 일을 지레 상상하며 예민해질 때도 있다. 예민해질 때는 즐겁고 긍정적인 생각은 숨어버리고 그저 부정적인 감정만 내 머릿속을 뱅뱅 맴돈다.
그때마다 도쿄에서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일본 도쿄 서양미술관에서 보았던 모네의 그림을. 섬세한 빛을 받아 무한한 가능성을 뽐내고 다채로운 모습을 선보이던 그림 속 자연을...
03.추가 여행 정보(우에노 공원 국립 서양 미술관)
(블로그에 발행한 자료를 정리해 넣을 계획이며, 필요시 도쿄에 다시 방문 후 필요한 부분을 추가할 예정입니다.)
▶우에노공원 국립서양미술관, 사계절이 아름다운 곳
https://blog.naver.com/inpikaaa/223244888780
우에노역. 넓은 우에노 공원.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의 입장권.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한 남자의 초상> 루카스 크라나흐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든 유디트> 야코포 델 셀라이오 <봉납제단화 성삼위일체, 성모, 성요한과 성화기증자>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 <나폴리 항구의 추억> 윌리암 아돌프 부그로 <가브리엘 코트의 초상> 오귀스트 로댕 <생각하는 사람> 반 고흐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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