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시작은 ‘시간은 인간이 나눈 임의의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우연히 자주 보던 작가의 인스타그램 글에서 발견한 이야기였다. 부자든 가난하든 똑같이 흐르는 시간, 많은 자가 아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시간은 사실 인간이 편의를 위해 나눈 결과물일 뿐이라는 내용. 시간이 인위적이라는 사실은 당연히 알았지만 글에서 짚어주니 새삼 놀라웠다.
인위적으로 만든 '시간'이라는 존재를 프리랜서로 일할 때 쪼개며 활용하려고 아등바등했다. 시간을 분 단위로 나누면서 아껴 쓰고, 어떻게 하면 일을 빨리 그리고 효율적으로 끝낼 수 있을지 고민하며 지내왔다. 그러다가 번아웃이 오면 회복하느라 시간을 통으로 날려버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번아웃 이후에는 시간을 낭비한 만큼 다시 채우려고 일을 과도하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졌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유튜브에 ‘시간 관리’라고만 검색해도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고 지배하는 법을 알려주는 영상이 차고 넘친다. 수요가 높으니 영상도 많아지는 법이다.
우리는 모두 시간이라는 거대한 케이크를 자신이 원하는 크기에 맞게 계획해 잘라먹고, 소화하고 싶어 한다. 최근 유행하는 MBTI에서는 P가 무계획이고 J가 계획을 촘촘하게 짠다고 하지만, 느슨한 정도는 다를지라도 계획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
글을 쓰는 오늘도 시간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5분 안에 짧은 열 문장 번역을 끝내야지. 헬스장에 가서 1시간 운동한 후 집으로 돌아와서 폼롤러로 10분 정도 몸을 풀어야지. 재빨리 씻고 끝내지 못한 번역을 끝내야지. 다 지키지도 못할 계획을 꾸역꾸역 처넣는 나를 보고 시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연경아, 나 고만 좀 쪼개라… 많이 뭇다 아이가…”
그래서일까. 시간이 인위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을 때오히려 시간이라는 작위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올해 초 만다라트 계획표라는 야구 선수 오타니가 활용한 계획표까지 찾아보며 1년 계획을 짜던 내 모습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시기에 따라 정량적인 부분에서 어떤 목표를 이루고 싶은지 계획표에 작성했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고 계획표에 있는 좋은 결과만을 바라는 내용들이 과연 자신을 완전하고 행복하게 만들지에도 의문이 생겼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것도 있을 터인데.
마음속에 견고하게 세워두었던 인위적인 계획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간에 따라 나눈 계획이라는 견고한 성의 벽돌이 우르르 무너지자,단 하나의 질문만이 성안에서 빛을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계획을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본질적인 질문.
이런 계획, 저런 계획은 둘째치고,
결국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차가운 바람이 옷 안까지 스며드는 1월 도쿄는 시간을 많이 잊게 해 주었다. 1월답게 한국에서는 ‘올해 목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고민했지만, 일본 도쿄에서는 이번 여행을 무탈하게, 자신이 만족하면서 보낼 수 있으면 충분했다. 지난여름 도쿄와 달리 추위가 당연한 듯 스며든 1월, 전철 도요코선을 타고 평소 만나고 싶던 한 여자를 만나러 나카메구로로 향했다. 나카메구로는 한국에서 남자 친구가 방문해 보라고 추천한 장소이기도 했다. 이날 만나기로 한 그녀가 있는 곳과 가까워약속 장소로 정했지만,사실 나카메구로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전혀 모르는 동네였다.
일단 나카메구로에 가기 전에 오모테산도에서 하라주쿠역까지 걸어오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이때 다시 한번 계획과 시간을 잊게 된 해프닝이 있었다.
나카메구로역.
거미줄처럼 촘촘한 도쿄 전철을 이용할 때는 ‘스이카 카드’라는 교통 카드를 보통 이용한다. 지난 여행 때처럼 손쉽게 구할 수 있을 줄 알고 사전 준비 없이 도쿄에 왔는데, 이번에는 스이카 카드가 주요 전철역에서 소진된 경우가 많아 쉽게 구할 수 없었다.나리타 공항 근처에서 카드를 구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발권기에서 표를 사며 관광지를 떠돌았다. 일본은 전철 회사가 많아 다른 회사로 환승할 때 성가시게 표를 다시 끊어야 했다. 관광객이 많던 1월이라서 장소를 이동할 때 시간이 더 소요된 데다가 카드도 없어서 찾으러 다니며 여행하다 보니 미리 생각한 시간과 계획이 더 틀어졌다.
하라주쿠에서 나카메구로로 갈 때 전철 표를 사서 갈지, 아니면 카드를 어딘가에서 구해서 갈지검색하고 고민하다 보니 여행을 만끽할 수 없었다.
잠시 어두운 얼굴로 오모테산도의 빨간 벽돌이 쌓인 건물 주변을 걷다가, 그냥 ‘에이, 어떻게든 되겠지. 나중에 어떻게든 해결하겠지. 일단 여행을 즐기자’라고 생각하고는 고민거리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앞을 계획하고 시간을 허비하느라 1월 도쿄의 모습을 눈에 담지 못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할 순 없었다. 미리 카드 문제를 생각하지 못했던 과거와 전철 문제를 겪어야 할 미래보다 현재, 지금 이 순간이 여행할 때는 더 소중했다. 계획과 시간을 잊어버리자 오히려 여행이 즐거워졌고 해방감까지 느껴졌다.
다행히 몇 시간 후 하라주쿠에서 전철로 2분 거리에 있는 시부야역에서 우연히 스이카 카드를 구할 수 있었다. 하라주쿠를 실컷 구경하고 전철에서 멍하니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시부야역에는 카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인터넷 정보가 생각나서오로지 감과 확률에 의지해 시부야역에서 내렸고 다행히 구했다.
나카메구로역에 내리니 시계는 저녁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메구로강 옆.
강을 따라서는 얼핏 보아도 부촌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고급 타워 맨션과 세련된 가게가 이어졌다. 한국에 있는 그(남자 친구)가 좋아할 법한 분위기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나카메구로도 처음, 이곳에서 만날 그녀도 처음, 그녀와 함께 먹을 몬자야키도 처음이었고 이곳은 거주지가 아닌 나카메구로였지만, 이미 나에게는 웃게 해 줄 수 있는 추억이 있는곳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2.그래서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나카메구로 몬자야키의 시작은 발효 식품이었다. 발효 식품인 김치, 낫토, 치즈, 명란이 들어간 다소 신기한 몬자야키를 검은색 네일을 예쁘게 한 여자 직원이 철판 위에서 섞어 주었다.
커피숍에서 달콤한 라테를 마시며 잠시 시간을 보낸 후 방문한 몬자야키 전문점은, 가게 크기가 아담하고 테이블, 의자, 사람들 등 모든 것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일본 현지 느낌이 물씬 나는 가게였다. 고맙게도 몬자야키를 먹고 싶다고 한 나의 요청에 맞추어 가게를 찾아봐 주고 예약도 해 준 그녀가 먼저 가게에 도착해 있었다.
윗옷을 벗어 걸어두고 직원이 철판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일자 형태의 카운터석에 앉은 우리는 메뉴를 보았다. 스페셜 몬자야키 메뉴 중 가장 위에 있던 발효 식품을 이용한 몬자야키(美発酵スペシャルもんじゃ)를 먹고 싶다는 말에 그녀는 바로 응해주었다. 그녀는 다코야키 스페셜 몬자야키, 3종 치즈 몬자야키처럼 더 익숙한 몬자야키도 있는데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발효 식품 몬자야키를 선택할 줄은 몰랐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하하, 전 호기심이 많고 음식에 있어서는 단순하답니다. 난생처음 먹는 몬자야키에 제가 좋아하는 김치와 낫토가 들어가 있으니 호기심이 일고, 메뉴판 가장 위에 있길래 위에 있을 정도면 맛있겠거니 싶었어요.
나도 몬자야키를 이때 처음 먹어보았으니, 지금 책을 읽는 독자가몬자야키라는 음식을처음 들어보았다면 독자와 같은 시선에서 이 오묘한 음식을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극단적으로 설명하자면, 몬자야키는 밀가루 음식을 먹고 토한 듯한 찐득한 모양이다. 유튜브에서 처음 본 몬자야키는 생김새가 괴이쩍어 당황스러웠지만 어째서인지 그래서 더 호기심이 일었다. 혼자 도쿄를 여행하지만 누군가와 함께할 때 술을 곁들여 꼭 도전해보고 싶던 음식이었다. 여행할 때는 평소보다 한층 더 원초적으로 '처음'에 도전하는 자신이 있었다.
술과 함께한 몬자야키.
도쿄 1월 나카메구로는 처음인 것들의 향연이었다. 1월 나카메구로는 당연히 처음이었고 그다음 '처음'은 몬자야키였다. 여자 직원은 철판 위에서 양배추 등 각종 재료를 잘게 부수고 볶다가, 중간이 텅 빈 도넛 모양으로 만들더니 그 안으로 걸쭉한 몬자야키 반죽을 넣고 잠시 후 섞었다.
김치와 밀가루가 섞여 김치전 색깔이 된 반죽을 넓적한 주걱으로 부지런히 섞는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김치전도 아닌 것이, 오코노미야키도 아닌 묽은 그것이 뜨거운 철판 위에 느긋하게 늘어져 있었다. 작은 주걱으로 떠서 접시에 담은 후 호호 불어 입 안에 넣으니 발효 식품의 독특한 풍미와 찐득한 죽 같은 식감이 가득 느껴졌다. 구워진 부분에 따라 물컹한 부분과 바삭한 부분이 있었고, 나는 바삭한 부분이 더 좋았다.
몬자야키의 신기한 모양.
그다음 '처음'은 그녀였다. 그녀의 글이 좋아 SNS에서 몇 번 댓글을 주고받다가 갑작스레 만나서 식사하자는 제안을 했음에도 그녀는 흔쾌히 받아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사진만 보았을 뿐 실제로는 처음 보았다. 첫 만남의 설렘과 술기운, 1월의 쌀쌀한 날씨 때문에 몬자야키를 먹으면서는 온전히 생각하지 못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떠올려보니 그녀는 참 흔쾌한 사람이었다. 분명 내가 앞뒤 두서없이 떠든 말도 모두 들어주고 생각해서 답해주었다. 2박 3일이라는 짧디짧은 나 홀로 여행에 ‘누군가와 함께’라는 느낌표를 찍어줘서 고마웠다. 혼자 여행하면 잠시라도 함께하는 누군가에게 더욱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어찌 보면 처음이라 이질감이 가득해도 모자랄 나카메구로에서 편안하게 술과 몬자야키를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난생처음 쌉싸름한 맛이 매력인 고구마 소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꽤 오랜 시간 몬자야키 전문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녀는 하얗고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말을 참 조리 있게 잘했다. 기쁜 이야기도, 내밀한 이야기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표현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올해 목표가 무엇인가요?”
대화 중간에 잠깐 흐른 침묵을 못 참아서 평소 자신에게 던지던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온 걸까? 아니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걸까? 나조차도 이유를 모르는 질문을 던졌음에도 그녀는 참으로 차분하게 올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말해주었다. ‘새해를 맞이해 생각한 올해의 목표’라는 어찌 보면 누군가 한 번쯤은 생각했을 만한 평범한 주제를 물었지만, 그녀의 답을 듣고 자신에게 조금 충격을 받았다. 질문을 던진 것은 나지만 정작 나는 이 질문에 무엇이라 답할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새해에 빼곡하게 만다라트 계획표를 작성했음에도 이것들이 진짜 행복을 향해 가는 목표인지는 불분명했다.
그녀와 헤어진 후 숙소가 있는 아사쿠사로 가기 위해 전철에 몸을 실었다. 늦은 저녁임에도 전철에는 꽤 많은 사람이 있었고 이러한 사람들을 등진 채 서서 어둠이 외롭게 가라앉은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창문에 희미하게 비치는 술에 취해 조금 붉어진 얼굴이 외로운 어둠과 겹쳐 더 쓸쓸하게 보였다.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더라도‘올해 저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매일 시간을 쪼개서 움직이고 계획을 촘촘하게 짜도 정작 진정으로원하는 것은 모르는 삶을 살고 있었다.
스마트폰에 저장해 둔 만다르트 계획표를 불러내어 자세히 보았다.
…
매달 XXX만 원 이상 벌기.
매주 5~8곳 이상 실적서를 보내기.
큰 프로젝트 늘리기.
…
빽빽하게 적힌 계획들은 모두미래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지만, 현재의 자신은 부족하니 미래를 위해 더 내달리라고 채찍질하는 듯해서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결말만 생각하고 계획하느라 ‘지금도 잘하고 있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현재를 응원하고 감싸는 마음은 완전히 등한시하고 있었다. 이루면 행복할지 불행할지도 모르는 계획 따위보다 매일 한 걸음씩 걸어 나가는 현재의 모습이아름다울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해피 엔딩만 생각하며 자책하고, 더 잘하라고 내몰기보다는 이대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고 괜찮다는 위로를 자신에게 건네보는 건 어떨까?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않을 독한 말을 본인에게 내뱉으며 몰아붙이는데 익숙해져서 ‘이대로도 괜찮다’는 말이 너무나 다가가기 어려운 말처럼 느껴졌다.
교통 카드 문제 따위 잊고 그저 현재의 빛나는 풍경만을 즐기며 도쿄를 여행하던 나처럼행동해도 괜찮을까?
이제 겨우 1월이지만 짧은 얼마간 내가 해온 일을 떠올려보았다.
...
매주 글을 써서 올리려고 힘썼다.
계속 글을 쓰고 공모전에 도전했다.
새로운 남자 친구가 생겼고 행복해지려 노력했다.
용기를 내지 못해 손에서 놓았던 6B 연필을 손에 들고 다시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계속 생각했다.
일본 도쿄에 혼자 여행을 왔다.
번역이 효용성이 있는 직업인지 고민했지만 지금은 흥미로운 번역 문장을 만들었을 때 즐거워하고 있다.
삶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놓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
되돌아보니 미래만을 바라보지 않아도, 지금도, 이대로도 꽤 멋들어졌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해피 엔딩이 아니라 지금까지잘해왔고 '이대로도 괜찮다'고 조금은 어색하게 되뇌어보았다.신기하게도 괜찮다고 자신을 위로하자 오히려 자책하고 채찍질할 때보다 또 다른 '처음'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억지로 끼워서 맞추려던 해피 엔딩의 장례식을 치르고, 사람이 많음에도 고요한 일본 전철 안에서 다시 한번 창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