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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경 Jun 02. 2024

속상하기도 했지만 무서웠던 것이다. (3)

30대 INFJ와 ESTP의 연애

30대 INFJ(여, 글쓴이)와 ESTP(남) 커플 이야기

※ MBTI는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MBTI를 쓴 것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기 위함일 뿐,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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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시각인 오후 4시에 오늘 만나지 말자고 한 남자친구. 사귄 이후 처음으로 먼저 전화를 끊은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빨랫감을 놓고 침대에 누워 며칠 전처럼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저 속상해서 흘리는 눈물은 아니었다. 며칠 전 그날 새벽처럼, 약속을 지키지 않는 그에게 속상하기도 했지만 혹여나 이것이 나를 향한 사랑이 줄어들었다는 방증일까 싶어 무서워 흘린 눈물이기도 했다. 그때 그의 메시지가 왔다.


"연경 님 ㅠㅠ

내가 미쳤나 봐 헐 ㅠㅠ 오늘 만나, 오늘.

자다 깨서 이상한 소리 했어... ㅠㅠ"


"연경 님 화났어... 화나셨다..."


"연경 님 화 많이 났네... 미안해요,

전화받아주세요..."


평소 가늘게 내려 바짓가랑이를 살짝 적시는 가랑비보다는 갑자기 세차게, 짧고 굵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좋아하는 나였다. 우중충한 하늘뿐만 아니라 내 얼굴에 비가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애매하게 훌쩍거리기보다는 시원하게, 짧게 울고 싶던 나는 침대에 누워 벽을 보는 자세를 취하고선 본격적으로 울음을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위와 같은 메시지와 함께 의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지금 전화를 받으면 감정적으로 화를 낼 테고 화를 내는 모습은 그에게 보여주 싶지 않았던지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메시지와 함께 7번 넘게 전화가 오자 미안한 마음이 들어 결국 전화를 받았고, 그가 사는 동네에서 보기로 했다. 이날 새벽에 태국에서 귀국한 그를 위해 내가 운전해서 그의 동네 가기로 한 것이다. 


약속을 취소하려 했던 그에게 속상하고 막막한 기분을 느끼며 감정을 소모했더니 나는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INFJ는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이해해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이 조리 있게 말할 자신이 없으면 좀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참고: 유튜브 <길 인간학연구소>). 나이가 들수록 나와 데면데면한 사람뿐만 아니라 친밀한 사람에게도 이럴 때가 많았는데, 나의 경우 상대방을 위하고 경청을 좋아해서 나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내 생각을 정리가 안 된 채로 말하기 시작하면 감정적인 생각이 뒤범벅되어 얘기 자체가 산으로 가서 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내 이야기는 하지 않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보겠다. 나에게는 조금 특이할 수도 있는 연인과의 대화가 망하는 패턴이 있다. 예전에 다른 연인과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연인에게 무언가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고 해보자. 마침 그 생각이 들었을 때는 지쳐 있거나 몸 상태가 안 좋기 때문에 힘이 없어서 딱히 불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먹거나 쉬어서 다시 힘이 생기면 내가 속상했던 점을 말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내뱉은 그 말들이 매우 날카로운데, 본질을 꿰뚫는 말 아니라 겉돌고 상대와 분란만 생기는 발언인 경우가 많다. 요약하자면 '지쳐 있음 - 뭘 먹어서 힘이 남 -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감정적으로 말함 - 소통이 되지 않고 얘기 자체가 망함'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게 무서웠어. 속상했어. 슬펐어. 그러니까 이렇게 저렇게 해줘'라고 말하면 훨씬 깔끔하고, 솔직하고, 감정적이지 않은데, 슬픔이나 두려움, 외로움의 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탓인지 '자기밖에 생각 안 해', '왜 네가 쓸 것만 사 왔어?' 등등 본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로 상대에게 생채기를 냈다.


곱슬머리의 그는 그의 동네까지 오느라 지친 나를 보고 "왜 그렇게 말이 없어~"라며 내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반달 모양의 눈으로 쳐다봤다. 이미 지쳐 있던 나는 나조차도 섬뜩 놀랄 만한 욕을 속으로만 하며 일단 무언가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곱슬머리의 그는 저녁 메뉴 후보로 고기와 분식을 꼽았고, 나는 분식집에 가서 떡볶이를 먹자고 했다. 그는 분식만 먹어도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떡볶이를 선택한 이유는, 전날 그가 태국에서 한국에 돌아오면 떡볶이를 먹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떡볶이를 먹어도 상관없고, 뭐...

속으로는 섬뜩 놀랄 만한 욕을 하면서도 저녁 메뉴로 그가 좋아하는 떡볶이를 선택하는 나를 나도 모를 노릇이었다.




나: 곱슬머리 씨는 맨날 잠만 자요!


나는 '지쳐 있음' - '뭘 먹어서 힘이 남' 단계를 지나서 '본질과는 상관없는 감정적인 말을 함' 단계에 들어섰다. 태국에서 다른 관광지는 구경하지 않고 호텔에서 거의 잠만 잔 그를, 이날 야구 예매도 못 하고 약속 시간이 될 때까지 잠만 잔 그를 떡볶이를 먹다가 돌연 비난했다. 초등학교 앞 분식집처럼 떡볶이 냄새가 풀풀 나는 정겨운 분위기의 가게 안에 앉아 그에게 잠이 많다고 꾸짖는 나는, 마치 오려 붙인 것처럼 그 장소와 어울리지 않았다. 내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곱슬머리의 그: 태국에서 내가 먹을 초콜릿 사 왔거든. 그게...

: 참나, 자기 먹을 건 잔뜩 사 왔네!

곱슬머리의 그: ......


곱슬머리의 그가 떡볶이를 먹다가 고개를 들고 나를 째려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오늘 나와 만나자마자 태국에서 파는 건망고 스낵과 코코넛 캔디, 면세점에서 구매한 립스틱을 선물로 줬다.


과거의 경험을 되짚어 보았을 때 내 입을 틀어막지 않고 이대로 계속 말하다간 '진짜 속상한 이유'와는 상관없는 말만 하다가 대화가 망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무어라도 말하지 않으면 다시 말할 타이밍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말을 멈출 수 없었고, 안타깝게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본질적인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떡볶이를 먹고 그의 동네에서 가까운 귀산에 나의 차를 타고 갔다. 초행길에 구두를 신고 운전하니 발은 아프고, 마음을 많이 썼더니 피곤하고, 옆에 앉아 있는 그에게는 마냥 속상했다. 속상한 마음이 생기니 귀산 어떤 카페에 갈지 그제야 찾는 그의 행동도 조금 미웠다. 그래서, 준비가 되지 않은 말은 좀처럼 입 밖에 내지 않는 나지만 이날은 나오는 대로 말했다.


<차 안에서>

: 곱슬머리 씨는 계획이 없어요! 불쑥 전화해서 보자고 하잖아요! 나는 몇 시 몇 분으로 계획을 정해야지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인데! 그리고 갑작스럽게 전화해서 꾸밀 필요 없이 편하게 오면 된다고 하면서도, 막상 만났을 때 안 예쁘면 싫어해요!

곱슬머리의 그: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야, 내가 언제...

: 이번에도 내일 토요일에 갑자기 일을 한다고 하지 않나... 부들부들...!!

곱슬머리의 그: 아, 너 내일 내가 일하는 거 몰랐어? 저번에 해외여행 다녀왔을 때도 다음날에 일했잖아. 그래서 아는 줄 알았는데...

: ... (어이없다는 표정)


-


: 내가 화가 나서 이러는 게 아니라! 곱슬머리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어서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거예요!

곱슬머리의 그: 보통 사람들은 그걸 화가 났다고 해.

: 그럼 전 이런 말도 못 하나요! 나 참, 이제는 내가 말도 못 하게 막네!

곱슬머리의 그: 하하... (어이없다는 웃음)


-


: 내가 곱슬머리 씨를 사랑해서 그냥 있는 거지! 만약 친구였으면 바로 손절이에요, 손.절!

곱슬머리의 그: 야....

: ......손절이라는 단어는 쓰면 안 되는데 써서 미안해요...


<카페에서>

곱슬머리의 그: 해외여행하면서 피로가 쌓였는지 좀 피곤해.

: 참나! 오늘 운전도 내가 하고, 그냥 집에 있다가 띡 나와서 놀 띡 들어가면 끝인데 그게 힘든가요!

곱슬머리의 그: (웃음이 터트리며) 야! 띡이라니! 그렇게 치면 내가 차를 타고 너희 집에 데리러 갈 때가 훨씬 많은데 너도 띡 나오잖아! 띡! 띡!

: (자신도 웃음이 터진다)


본질을 꿰뚫기는커녕 본질의 주변도 맴돌지 못하는 영양가 없는 말만 하다가, 정신을 차리니 전면이 유리로 된 카페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둡게 깔린 밤하늘 밑으로 마창대교가 밝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우리는 그러한 존재감을 눈으로 만끽하며 어느샌가 서로에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처음 가 본 귀산의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고 날씨는 기분 좋아질 정도로 선선했다. 카페에서 마신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커피맛이 조금 아쉬웠지만, 곱슬머리의 그와 귀산에 처음 왔다는 것, 둘이서 새로운 곳에 왔다는 사실은 나에게 대단히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다가 나는 내뱉은 말이 우리 사이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날카롭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정리가 안 된 말을 하다 보니 이상하게 말했다고 전했다. 곱슬머리의 그 또한 헤어지는 길에 와줘서 고맙고 다음에는 안 그러겠다며, 너무 화내지 말라는 말을 나에게 전했다.


그와 헤어지고 집에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내가 태국에 있던 그와 전화하고 울었던 그 밤으로. 이는 그에게 나의 생각을 털어놓고 응어리를 풀고 싶은 마음에 깨어난 본능이었다. 오늘 그와 만난 후로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말만 늘어놓았지만, 이제라도 나는 눈물을 흘렸고 왜 눈물을 흘렸는지 그에게 솔직하게 전하고 싶어졌다. 이상하게 볼까 봐 다른 사람에게는 전하지 못한 나의 마음을.


"아까 곱슬머리 씨가 오늘 만나지 말자고 해서 울었다고 했잖아요? 근데 제가 운 건 곱슬머리 씨 때문만은 아니에요. 어제 소설책을 읽는데, 주인공이 좋아하던 사람이 결국 자살을 한 거예요.


안 그래도 어제 엄마, 아빠와 밥을 먹었는데 나이가 드신 게 느껴졌고, 곱슬머리 씨도 이번 주에 못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소설책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주인공처럼 저도 소중한 사람들이 제 곁을 떠날까 봐 무서웠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울었어요... 생각의 흐름이 희한하죠? 소설책에 너무 과몰입했나 봐요. 뭔가 이상해 보여서 곱슬머리 씨에게 말하지 못했어요.


태국에 다녀와서 먹을 거랑 립스틱을 줘서 정말 고마워요. 저번에 립스틱을 받았는데 또 받다니 저는 복 받았네요, 행복해요. 립스틱이 예뻐서 다음에 곱슬머리 씨 어머니 사드려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다음에 사드릴게요. 감사해요. 건망고 스낵도 큰 걸로 사 왔네요. 망고 젤리에 건망고까지 있다니 저는 망고 부자예요."


길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몇 분 후에 바로 그의 답장이 왔다.


"울지 말아요! 안 울어도 돼! 전 언제나 연경 님 곁에 있어, 걱정 마!!"


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다른 사람에게 슬픔 능숙하게 말하지 못하는 내가 곱슬머리의 그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다니, 적어도 나에게는 관계가 아주 크게 발전한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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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번역가: https://linktr.ee/linakim_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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