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청탁하지 않았지만 써 보는
8년 차 번역가 딸을 둔 현실주의자 엄마의 인터뷰
얼마 전 새로운 친구들과 만났는데, 요즘은 대부분 처음부터 MBTI를 물어보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글에서도 처음에 제 엄마의 MBTI를 써 보려고 해요. 엄마는 ISTJ예요.
ISTJ = 지극히 현실주의자
사실 10대, 20대 때 이상주의자 ENFJ인 제게 엄마는 현실적인 말로 일침을 날리시기도 했는데요. 그땐 제 공상을 깨부수고 찬물을 끼얹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삼십 대 중반이 된 지금은 생각이 달라요. 누구보다 가정이라는 현실을 지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신 엄마의 대단함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게 얼마나 힘든지도….
이십 년 넘게 교사로 근무하며 우뚝 솟은 대나무처럼 꾸준하게 가족을 지켜 온 그녀. 이제 그녀에게 대나무숲이 되어보고자 합니다.
어느 날 프리랜서 번역가를 하겠다며 이상을 펼치기 시작한 저에 대한 진솔한 생각을 엄마에게 들어보았습니다. 중간중간 도움이 될 만한 번역가 정보도 적어 두었으니 참고하시길 바라요.
인터뷰를 시작하며
나: 질문이 생각을 좀 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서 어렵지 않겠어?
엄마: (카리스마) 전혀 아니다. 있는 그대로 말할 거다.
나: 오호….
①들어가며
1. 딸이 번역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처음엔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번역가라는 직업을 처음 접해서 매우 생소했다. 그리고 ‘연경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이 직업이 상당히 멋지게 들리는데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딸의 어린 시절의 모습까지 떠오르더라. 연경이는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친구 유진이(갑자기 초등학교 친구 이름 등장)랑 옆 동네 도서관에서 책도 빌려 와서 읽을 정도로 책을 좋아했는데, 아, 그때 내가 찻길로 걸어왔다고 혼냈다(간간이 등장하는 나를 걱정하는 모멘트), 그런 옛날 에피소드를 떠올리니 어쩌면 글을 접하는 번역가가 연경이에게 맞는 직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틈새 번역가 정보: 번역가로 일하면 영상 번역가/산업 번역가라도 책과는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번역가 중에서 글 쓰는 분도 많고 책을 좋아하는 분도 봤다. 바빠서 책을 못 읽는 경우는 있어도 책을 싫어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권남희 번역가님의 에세이를 보아도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고 나온다. 번역가들이 좋아하는 책의 장르는 다양했다.
2. ‘번역가’라는 직업이 처음에 생소하게 느껴졌다고 하셨는데요. 엄마에게는 어떤 일로 보였나요?
나도 젊었을 때 번역은 아니지만 글 쓰는 데 관심이 있었다. 문학 사상(1970년대에 창간된 한국의 대표적인 종합 문예지)이라는 잡지도 읽고 했었다. 당시 난 공부(엄마는 수학 선생님이셨다)만 했지 책을 많이 안 읽어서, 생활 수필 같은 건 쓸 수 있어도 누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창작물을 만드는 자질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도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딸이 글을 다루는 일을 한다고 하니까, 번역을 하면서 이것이 직업이 되고 생활 수단이 될 수만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②번역을 하는 딸을 지켜본 엄마
1. 번역가가 생소해도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셨네요. 그래도 처음에는 미덥지 않은 부분도 있고 불안하셨을 텐데요. 그런데 “아, 연경이는 이 일을 계속해도 되겠다, 번역가라고 말하고 다녀도 되겠다”라고 생각한 순간이 있나요?
돈을 꽤 번다는 걸 알았을 때 인정했다. 푸하하. (내가 ‘맞아, 맞아, 중요하지’라고 맞장구) 이게 생계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단지 취미로만 끝나면 부모 입장에서는 불안하다. 수입을 들어보니 ‘연경이에게 일을 주는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이 일을 계속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틈새 번역가 정보: 인간은 사고 싶은 것을 사고 먹고 싶은 것을 먹는, 즉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살 수 있다. 프리랜서는 의식주를 해결할 만큼 돈을 벌고 있을까? 프리랜서 번역가로 살아가면서 밥 먹을 돈이 없어서 걱정한 적은 없다. 매달 수입은 다르지만 수입이 아예 없던 적은 없다. 동시에 앞으로 일이 계속 들어올지는 예상하기 어렵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발굴하려고 자주 생각하고 행동한다. 쉽게 게을러지지 않는다. 현실에서 노력해 번역가라는 나의 이상을 유지하고 싶다.
2. 사실 번역이 고소득 직종도 아니고 엄마가 선생님을 하셨던 것처럼 안정적인 느낌도 아니어서 저는 항상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인데요. 딸이 번역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어 보였던 순간은 있나요?
마감 시간에 쪼들릴 때. 그리고 일 때문에 다른 걸 포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실 부모들은 젊은 시절을 거쳐 왔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의 힘든 생활을 다 이해한다. 나도 옛날에는 일이 1순위였다.
그리고 사실 번역만 힘든 게 아니고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로 힘들다(‘세상에 쉬운 일 없다’, 우리 엄마가 자주 하신 말. 옛날엔 서운했지만 지금은 희한하게 힘이 될 때가 있다). 이 일이 적성에 맞고 수입이 따라온다면 부모 입장에선 얼마든지 딸을 이해하고 기다려 줄 수 있다.
③엄마가 본 ‘번역가 딸’
1. 번역은 혼자서 일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람과의 만남이 적어질 수 있는 등,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있는데요. 이런 부분은 조심하는 게 좋겠다든지 걱정하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아무래도 번역은 문장에 집중해서 혼자 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면 생활 범위가 좁아지기에 자칫 잘못하면 편협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주기적으로 친구를 만나거나 사교 모임, 건전한 종교 활동 등에 시간을 할애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일만 하면 어느 순간 내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갑자기 틈새 번역가 정보: 엄마가 원래 나가서 활동하기를 좋아하시기에 저렇게 말씀하신 것일 테다. 이를 닮았는지 나도 앉아서 일만 하면 좀이 쑤셔서 나가서 사람들과 놀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만 이런 것이고, 번역가 중에서는 멋진 집돌이, 집순이도 많다. 번역가에게 필요한 자질 중 하나가 혼자만의 시간(번역과의 싸움)을 잘 보낼 수 있는 능력이다. 번역가가 되고 싶다면 자질에 맞는지 확인해 보자.
2. 번역의 특성은 충분히 잘 아시는 것 같은데, 이 일이 딸 성격이랑 잘 맞는 것 같아요?
세상에 자기한테 딱 맞는 직업은 누구에게도 없다. (팩트를 선사하시는 엄마) 그렇다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 ‘이전 직장을 비교했을 때 어떤 일을 더 잘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연경이가 번역을 좋아하니까 자기한테 맞는 직업을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3. 제가 이전 직장에서 약 4년 4개월을 일했고, 번역가는 8년 차예요. 그러니까 이전 직장보다 번역가로 보낸 시간에 두 배나 되는데요. 엄마 눈에 딸이 번역을 하면서 바뀐 점이 있을까요?
번역을 하기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번역가는 직업 특성상 사람한테 받는 스트레스가 훨씬 적고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다. 번역가가 글을 가지고 하는 일이니까 글과 책을 더 가까이하게 되고 지적으로 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옛날보다 엄마는 훨씬 좋다.
④끝맺음
1. 번역가 딸을 둔 엄마로서,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연경이가 이 일을 하기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번역과 글을 계속하고 싶어 하기에 이걸 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어차피 이거 아니면 당장 할 일도 없잖아~. (??)
그리고 한쪽으로만 치우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옛날처럼 너무 돈을 버는 데만 집중하지 말고 무리하지 않고 돈을 벌면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갔으면 좋겠다. 번역가로서 더 유명해지면 좋겠지만 이 정도도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2. 마지막으로 질문의 방향을 조금 틀어볼게요. 엄마가 선생님으로 25년 이상 근무하셨는데요. 거기에 비하면 현재 번역가 8년 차인 저는 한참 적기는 합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신 비결이 혹시 있을까요?
좀 부끄럽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일했다. 당시에는 요즘 젊은 사람들처럼 직장을 많이 바꾸고 그런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다. 학생들을 대할 때나 일하면서 갈등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교사라는 직업이 당시 여자에게 좋다고 했고 노후를 생각했을 때 현실적으로 계속 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도 다들 이렇게 산다고 생각했다.
3. 굉장히 현실적인 답변이네요. 말은 다 그렇게 산다고 해도 갈등 속에서 생활을 유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어쨌든 ‘쉬운 건 없으니까’ 묵묵히 해오신 시간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엄마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신지 묻고 싶습니다.
모두 건강하기만을 바란다. 옛날부터 나는 ‘박 선생은 참 욕심이 없네’라는 말을 듣곤 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 보면 건강하게 걱정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가장 큰 욕심이 아닌가? 비싼 물건 같은 것도 그다지 바라지 않는다. 각자 자리에서 건강하게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다. 자식들도 앞으로 잘될 거로 생각한다.
<소개>
언어를 통해 세상을 보고 생각하는 8년 차 번역가.
일본어, 중국지역통상학, 경영학을 공부했다. 이후 일본어 번역가로서 출판, 비즈니스, 영상, 관광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일본 여행과 글쓰기를 좋아하며 저서로 ⟪일본에서 한 달을 산다는 것⟫(공저), ⟪New Square 01 일상적 글쓰기의 기쁨과 슬픔⟫(공저), 번역 매거진 ⟪번역하다⟫(공저), 역서로 ⟪일단 나부터 칭찬합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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