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선배는 길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올해 봄에 은퇴를 한 선배- 대학생인 아들과 딸이 학교를 가고, 활동적인 아내는 각종 모임에 분주하고, 덩그러니 혼자 남아 눈에도 들어오지 않은 책을 뒤적이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라고 했다. 게다가 고약한 것이, 이십 년이 넘게 뿌리 박힌 출근시간의 루틴 덕분에, 아침 6시면 칼같이 눈이 떠진다고 했다. 그 시간에 눈을 떠도 딱히 할 일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일찍 하루를 시작하면, 안 그래도 긴 하루가 더 길게 느껴진다고 하소연을 했다. 선배는 자신보다 먼저 회사를 떠난 나 또한,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했으리라 짐작을 하고, 오늘 나를 만나러 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선배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다가 빙긋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제 책을 제대로 읽으셨어야죠 거기에 다 썼는데... " 나는 내 앞에 놓인 커피잔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놀리듯 선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선배의 막막함, 답답함 그리고 아마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유 없이 불안한 감정마저 들 것이다. 나 또한 그러했으니까. 그러나 그 과정을 스스로 이겨내고 나면 (이 또한 지나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생의 새로운 막이 열린다는 사실을, 지금 내가 아무리 목놓아 선배에게 말해주어도, 그는 결코 공감하지 못할 터였다. 나는 선배의 넋두리에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가며 받아주기만 했다. 선배는 이제, 일이 아닌 자신의 삶을 고민해야 할 때다. 그 자신의 삶이란, 일의 연속일 수도 있고, 새로운 도전일 수도 있고, 나를 반추하는 것 일 수도 있다. 나는 문득,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방랑의 미식가'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은퇴 후, 처음 혼밥을 하고, 대낮에 맥주 한 병을 시키는 걸 얼마나 망설이던지... 자신을 그저 나이 든 백수로 남들이 볼까 봐 말이다. 결국, 맥주 한 잔을 시원하게 비워낸 후 감격에 찬 그 얼굴이, 퉁퉁 부은 선배의 얼굴 위로 자꾸 오버랩되었다. ' 선배, 선배도 곧 알게 될 거야. 아무 일 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얼마나 축복인지..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