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삼풍 백화점 이야기를 해볼까요? 제가 짧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다시 입사한 회사에서의 일입니다. 막 대리로 승진한 저는 제법 커리어 우먼티를 내며 우쭐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광고회사가 급 성장하던 시절이라 날마다 일감이 쏟아졌고, 대기업 계열사였던 우리 회사는 주말도 휴일도 없이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또 팀장들은 유능한 본부장 밑에 줄을 대고, 그 본부장은 실세인 임원 밑에 줄을 댔습니다. 그저 일개미에 불과했던 우리들은 매 분기마다 바뀌는 팀과 본부 덕분에 수시로 짐을 싸면서 투덜 되었죠. “ 퇴사하면 포장이사 회사라도 차리자. 회사짐 옮기는 건 자신 있다.” 그런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제발 옮기는 팀의 팀장이 줄을 잘 서서 성과가 잘 나는 일들을 물어다 주길 바랐답니다. 그러나 어디 그런 복이 저에게 있을 턱이 없지요. 있는 것이라곤 일 복 밖에 없는 저는 할 일은 남들보다 두세 배이면서 생색은 전혀 나지 않고, 게다가 까탈스러운 광고주들로 어벤저스를 이룬 팀으로 발령이 났답니다. 원 플러스 원으로 가장 깐깐하고 완벽주의에 가까운 차장님을 사수로 모시는 영광까지요. 힘겨운 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옆자리로 모 계열사 임원의 딸이라는 소위 낙하산이라고 불리는 여직원이 발령이 났습니다. 직종은 피디였는데, 소문을 듣자 하니 제법 똘똘하고 일도 잘하나, 출퇴근이 제멋대로 여서 모든 팀에서 팀워크를 문제 삼으며 거절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백도 없고 일손도 부족한 저희 팀으로 오게 되었다는군요. 저는 참으로 부러운 팔자라고 생각하며 11시가 다 되어 출근을 해서 인터넷 채팅을 하는 그녀를 무심하게 힐끔 거리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둘이 사내 식당에서 나란히 식판을 놓고 밥을 먹기도 하고, 그녀를 아낀다는 모 제작팀의 회식자리에도 그녀와 함께 가기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광고회사는 대부분 남초 집단이었고, 여자 동료가 귀했으니까요. 저와 그녀는 같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고, 막상 이야기를 해보니 제법 말이 잘 통했습니다.
그녀를 조금씩 알아갈수록 그녀에게 이상한 취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절대 그녀의 또래 남자들과 술을 마시지 않으며, 항상 그녀에게 소위 아버지 벌에 가까운 남자들과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요. 대기업 임원의 딸인 그녀가 술값이 없어서 일리는 없고, 뿐만 아니라 그 당시 광고회사는 연봉이 높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그녀가 왜 그러는 지를 우연히 알게 되었답니다. 초저녁부터 나이 지긋한 선임 팀장과 술을 마시던 그녀는, 다짜고짜 저에게 전화를 해서 나오라고 했죠. 안 그래도 줄지 않고 쌓이기만 하는 일에 스트레스가 폭발 직전이었던 저는, 냉큼 그러겠다고 답을 하고 선배들이 회의에서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가방을 챙기고, 오늘은 일이 있어 먼저 들어가겠다는 메모를 남겼죠.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설렁탕집에서 수육과 술국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던 그녀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저를 보며 상기된 얼굴로 과하게 웃으며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인상 좋은 팀장은 그녀 옆에 나란히 앉은 저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 쟤, 벌써 제법 취했다.” 그녀는 저에게 넘치게 술을 따라주고 안주를 억지로 제 입안에 밀어 넣으며 말했습니다. “ 나는 있잖아. 아버지가 가슴에 있어. 우리 아버지 나 때문에 돌아가셨거든. 아버지한테 내가 선물만 안 사드렸어도 … 아버지가 그때 그걸 바꾸러 가지만 않았어도… “ 그리고 닭똥 같은 눈물을 갑자기 쏟아냈죠.
그녀의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회사에 당당히 공채로 입사한 그녀는 첫 월급으로 대기업 임원이시던 아버지를 위해 넥타이를 사드렸습니다. 그녀의 집과 가까웠던 삼풍백화점 1층 잡화 매장에서 말이죠. 아버지는 딸이 첫 월급으로 사준 선물이 너무 감격스러웠지만, 수수한 아버지의 취향과 달리 화려하고 튀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의 취향이 골라준 넥타이가 조금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딸의 허락을 받고, 없는 시간을 쪼개서 삼풍백화점에 넥타이를 교환하러 간 것이죠. 그리고 퇴근길에 그 넥타이로 갈아 매고 딸을 기쁘게 해 줄 요량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막 넥타이를 교환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오는 그 순간, 백화점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녀는 그녀가 선물한 넥타이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간절한 그리움이 그녀를 아버지 뻘인 남자들과 어울리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후로 저는 그녀에게 마음이 갔습니다. 그녀가 가끔씩 쓸쓸하게 짓는 미소가 자주 눈에 보였고, 그녀의 이유 없는 반항기와 제멋대로인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정신없이 바빴으며 수시로 선배들에게 불려 다니며 혼이 났고, 팀을 겉돌던 그녀는 미국 유학을 선언하고 퇴사를 했습니다. 회사를 떠나는 마지막 날 그녀는 저에게 그녀가 쓰던 만년필을 선물하며 말했습니다. “ 너도 얼른 이곳을 탈출해라. 여기 있기에 네가 아깝다. 진짜…” 어린아이 투정 같던 그녀의 말이 그 순간 어찌나 고맙던지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 앞까지 그녀를 배웅하며 그녀가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행복하길 기도했습니다. 신의 계획은 그녀의 아버지를 데려가시고 그녀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셨을까요?
문득 일련의 저와 관련이 있던 큰 두 개의 사건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말해봅니다.’ 눈을 뜨면 감사해라. 내가 오늘 죽지 않고 살아 있고, 내 주위에 그 누구도 죽지 않았음을 확인했다면… 이것보다 감사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신의 계획은 오늘도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지는 우리의 몫이지만 살았다는 그 사실만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어도 좋지 않을까요. 매일 이런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남은 반컵을 채울 수 있으면 축복이겠지요. 오늘도 저는 살았습니다. <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