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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y 19. 2016

어른의 꿈

다시 꿈꾸는 평범한 날들



아줌마도 1층 가죠?



아이는 새카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응, 나도 1층 갈 거야, 대답하자 곧바로 1층 버튼을 꾸욱 눌렀다. 6-7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처럼 버튼 앞에 딱 붙어 서 있었다. 엄마가 엘리베이터에 타면 먼저 물어보라고 하셨거든요. 또박또박 대답하는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보였다. 그렇게 15층부터 1층에 가기까지 사람들이 몸을 실을 때마다 아이는 몇 층 가세요? 맑은 눈으로 물었다. 대부분 1층에 가는 것일 텐데도 쉼 없이 말을 걸었다. 사람들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아파트로 이사 온 지도 어느덧 두 달.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었다.



가방만 놓고 이 앞에서 다시 만나!



내가 나고 자란 아파트는 이사한 동네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15년 넘게 살았던 단지는 초중고 동창들이 옹기종이 모여사는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우리 집은 친구들과의 하굣길, 가장 먼저 지나치게 되는 곳이었다. 내가 먼저 집으로 뛰어들어가면 다른 친구들은 두세 개의 동을 더 지나 각자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그리고 10분 뒤, 마치 처음 보는 듯한 반가운 얼굴로 다시 모였다.



어떤 날은 중앙에 있는 놀이터에서, 또 어떤 날은 우리 집 대문 앞에서 한참을 놀았다. 1층이었던 우리 집은 가장 마음 편히 놀기 좋은 공간이었다. 놀이터 대신 집 앞에서 놀게 되는 날은 1층 전체가 모조리 우리 차지가 되었는데, 그 길목에서 반나절을 보내다 보면 다른 층의 사람들과 수없이 마주쳤다. 화단에 있는 빨간 벽돌을 집어와 소꿉장난을 하던 날도, 엄마와 함께 문방구에서 산 팽이를 돌리던 날도 여러 이웃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아유, 얘들아 조심해. 계단에서 넘어질라. 시간도 늦었는데, 엄마가 찾으시겠다. 어느 층에 사는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었지만,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아빠였던 그분들은 스스럼없이 정답게 말을 걸곤 하셨다.



그렇게 어둑어둑해질 무렵까지 아파트 품에서 놀다 보면 어디선가 구수한 된장찌개와 밥 냄새가 풍겨오곤 했다. 그 정겨운 냄새와 함께 수현아, 밥 먹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아이들은 순식간에 각자의 따스한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당시 흔하디 흔했던 그 일상이 20살 이후, 다시는 보기 어려울 그것이 되어버릴 줄은 아무도 몰랐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동네 친구들은 물론 나 또한 낯선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앞집에 누가 이사 오나 봐. 짐 옮기는 건 봤는데, 얼굴은 여태 못 봤네.



두 달 전까지 지낸 오피스텔은 앞집 혹은 옆집 대부분 근처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직장인들이 살고 있었다.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일도 흔했지만, 인사를 하는 일은 없었다. 중간중간 엘리베이터가 멈춰 설 때마다 시간이 지체되는 것에 대해 한숨만 푹푹 쉴 뿐,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매일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표정의 사람들, 대화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어폰. 그 냉랭한 것들에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돌연 이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됐다. 누가 오고 나가는지, 크게 관심이 없던 오피스텔과는 분명 달랐다. 그건 꽤나 큰 변화였다. 단순히 사는 동네나 위치가 달라진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할부지. 할부지. 집에 가자. 엄마가 밥 먹을 시간이래.



1층에 도착한 아이는 후다닥 경비실 앞 벤치로 달려갔다. 자그마한 벤치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키셨다. 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할아버지의 팔을 얼른 부축했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뭐든지 빨리빨리 해야만 속이 편할 것 같아 보이던 아이도 그 순간만큼은 한 발 한 발 정성을 다해 걷는 것 같았다.



아이의 목소리를 듣느라 한 손에 빼두었던 이어폰이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바삐 움직이던 발걸음은 우뚝 선 채 갈 길을 잃었다. 아이와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지난 날의 풍경을 사무치도록 그립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 마음에 품었던 화려한 꿈보다 지금 바라는 이 소박한 꿈이 더욱 이루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른의 꿈이 평범하다 느껴졌던 어느 날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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