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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r 06. 2018

공짜라서 다행인 것들

종일 사람에 치인 날이면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봤을 때, 시곗바늘은 벌써 오후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한번 상해버린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요 며칠 힘든 날들의 연속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은 사람과 종일 마주해야 하는 날도 많았고,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인데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쓰러져 잠든 날도 많았다. 어느 것 하나 내 마음 같지 않았다. 이런 속내를 숨길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는지 매일 꼭 붙어 일하는 선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저 사람, 너한테 중요한 사람이야?"

"아뇨."

"그런 사람이 한 말을 뭐하러 오래 담아두고 있어. 흘려들으면 그만이야. 얼른 퇴근해."



나는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짐을 차곡차곡 가방 속에 담았다. 오랜만에 하는 칼퇴근. 회사 밖을 나가면 반가운 친구들과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전처럼 신이 나지 않았다. 누군가를 만나기라도 하면 그 사람을 붙들고 그동안 쌓인 불만들을 와르르 토해낼 게 분명했다. 해결되지 않은 이야기를 속이 풀릴 때까지 말하고 나면 조금 나아질까. 어쩌면 마음만 더 무거워질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풀지 못하면 누구를 만나도 상태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약속 장소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다른 길로 걷기 시작했다. 매일 걷는 길 말고, 매일 보던 풍경 말고, 조금이라도 다른 것들을 보고 싶었다. 때마침 봄기운을 느끼기 좋은 날이었다. 



광화문에 다다랐을 무렵,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며 어딘가로 뛰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보고 싶은 게 있었는지 아이가 인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길을 건너던 사람들도 그 무언가가 궁금해졌는지 아이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노을 진 하늘뿐이었지만, 왠지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저렇게 예쁜 것들을 어딘가에 잘 담아두었다가 오늘 같은 날 두고두고 꺼내본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좋은 감정들은 오래 즐길 줄 알고 나쁜 감정은 금세 떠나보낼 줄 아는 사람이고 싶은데. 좀처럼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더 있었을까.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동안, 내 머릿속에 엉켜있던 생각들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올해 유난히도 오래 버틴 것 같은 겨울바람은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바뀌어 있었고,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오늘 내 뜻대로 되어준 한 가지가 날씨라서 다행이었다. 공짜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커다란 위안이 되어준 것들. 종일 사람에 시달렸다고 느껴지는 날이면 사서 고생이라 해도 이 모든 것들을 다시 만나러 와야겠다고, 사람에게로 향하고 싶은 발걸음을 어르고 달래 완전히 새로운 길을 거닐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니 어릴 적 누군가가 가졌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눈으로 보기엔 참 별거 아니었던 풍경을 왜 어른들은 그토록 좋아했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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