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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산공원 Mar 03. 2024

봄을 기다리는 마음, 겨울을 이겨내는 마음

[메주쑤기클럽] 여섯번째 주제 - 사랑과 봄

글이되든 밥이되든 일단 매주 써보는 모임입니다.

요술버선, 쏠, 스누피, 산, 제호사, 모험가지나, 영은, 임카, 나무가 6편의 글을 함께 쓰기로 했어요.


여섯번째 주제는 '사랑과 봄'입니다.



멀고도 가까운

by. 산


이번 명절엔 집에서 뛰쳐 나왔다. 옷가지와 가방을 대충 챙기고 마루를 나서는데 엄마가 급히 따라와 챙겨놓은 반찬이 담긴 비닐을 주섬주섬 건넸다. “이러고 살 거면서 왜 자꾸 오라고 하는거야, 저런 사람인걸 알면 대충 맞추고 살아야지. 아님 같이 살지 말던가!!” 정작 밥그릇을 내던지고 큰 소리를 지른 건 아버지였는데 공연히 화를 돋운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나왔다. 쩔쩔 매며 멀뚱히 서있는 엄마를 뒤로 세우고 씩씩거리면서 차를 쌩 몰았다.


만만한 게 엄마지. 남은 엄마가 얼마나 곤란할지 계속 생각하면서 시골집 동네 입구에서, 집에 가는 길목에서 차를 멈춰 세웠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엄마라도 데리고 나올까. 지긋지긋하다, 여전히 이 꼴을 봐야한다는 게. 10대 내내 지긋지긋하게 느꼈던 공포와 분노였다. 그곳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불쑥 같은 상황이 오니 금방 익숙한 감정에 젖어들었다. 폭력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 사람처럼 콱 얼어붙은 더러운 감정이 며칠동안 몸에 붙어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엄마에게 소리를 질러서 미안하다 사과를 했다. 엄마는 괜한 소리를 한 제 탓이라며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고 안쓰럽고 답답하고 속이 터졌다. 엄마에게 평생을 느껴온 감정이 그랬다. 안쓰럽고 불쌍한 사람. 요령 없고 답답한 사람.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자꾸만 만드는 사람. 지기만 하고 당하기만 해서 어린 내가 감싸주고 지켜줘야 하는 사람. 동생과 나를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 결국엔 돌보아야 하는 사람. 그래서 안쓰럽고 귀여워야하는 사람.


나는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사랑은 다 바깥에서 배운 거라고, 숱한 우정과 연애로부터 배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사랑한다는 말을 나눈 것도 애인이 처음, 소중한 마음을 담은 선물을 받은 것도 친구가 처음이었으니까. 우리 가족에게선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이 오가지 않았으니까. 그건 낯간지러움 때문 일수도 있지만, 이런 것이 사랑이라고 믿고 싶진 않아서이기도 했다. 배려 없이 일부러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것. 함부로 할퀴는 것. 매일 밤 부서지고 아침이 되면 주섬주섬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것. 좁아터진 집에서 같이 살아가야한다는 이유는 서로가 가난하기 때문이지 사랑 때문은 아닐 거라고. 그렇게 믿으면서 긴 시간을 견뎌냈다.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 독립할 수 있게 되자, 서로의 얼굴을 매일 보지 않게 되자 나는 비로소 부모님과 웃으며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마치 좋은 사이처럼, 원래 그렇게 살아온 정상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다. 가끔 보기 때문에 다정할 수 있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나는 성공적으로 적당한 애정을 둔 채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종종 이렇게 터질 듯이 원망스러운 감정이 들 때마다, 나의 고질적인 어둡고 컴컴한 부분을 볼 때마다 내 감정의 바닥을 들여다보게 됐다. 나이가 들어서 자라온 가정환경에서 문제의 이유를 찾는 건 꽤 치사한 어른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속으로 깊이 원망하는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건 거리두기로도 해소가 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깨끗하고 단정하게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리셋버튼이 없는 것처럼 가족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순 없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일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나는 친구와 동료들로부터, 좋은 책으로부터 사랑을 발견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배울 수 있는 능력은 나의 소중한 밑천이다. 리베카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며 그를 이해하는 여정을 그린 책이다. 평생 딸을 못마땅해하며 질투해 온 어머니의 투병을 관찰하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혹은 이야기를 찾아다닌다. 어머니 집 마당에 떨어진 살구 열매를 나누는 에피소드에서 출발해 체 게바라가 만난 나병 환자들의 이야기, 멀리 아이슬란드의 설화 이야기로도 이어진다. 그 이야기 속에서 어머니를 이해하고 화해한다. 옮기이의 후기처럼 나 역시도 ‘과연 이 이야기가 어떻게 화해로 이어질까..?’를 궁금해하며 읽었다.


타인의 이야기가 들어올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내 이야기의 일부를 비워 내는 것. 그렇게 타인의 어휘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더 커진 경계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을 성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 타인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과 나의 이야기를 지켜 내는 것이 결정되는 경계, 혹은 한계가 "더도 덜도 말고 딱 사랑의 한계"라고 솔닛은 말한다. (...)

그 한계를 알고 난 후에도 여전히 누군가가 궁금하다면, 그이의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그이에게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수 밖에 없다. 심지어 그 대상이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쉽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기꺼이 한번 해 볼만한 질문임을 이 책이 증언하고 있다.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언제나 기다림이 아니라, 내 쪽에서 먼저 내딛는 한 걸음이다.


그러니까 나는 기어이 엄마에게 먼저 질문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기다릴 것이 아니라, 먼저 내딛어 보겠다고.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해보겠다고. 사랑의 바닥을, 밑천을, 한계를 넓혀보겠다고 다짐한다. 다짐. 그걸 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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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들여다보고 질문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어서.. 일단 씁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 겨울을 이겨내는 마음

by. 나무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난 늘, 반만하는 사람이다. 열정적이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판을 크게 키우는 것 하나는 자신 있어 무엇이든 간에 크게 시작하고 마무리를 못 짓는 채로 시작만 덩그러니 남겨져있다. 누군가 시작할 때 내게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마무리를 잘 하지 못합니다."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내 삶에 가장 큰 비겁함이며,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부끄러운 민낯이기 때문이다.

도망치다 문득 뒤를 돌아보면 돌이키지 못할 강을 건너 반대편에 남겨진 무언가의 표정을 알 길이 없다. 완벽한 마무리를 경험해 보지 못한 나에게 이런 상황엔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머리로는 알다가도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두 번 슬퍼진다.


내가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까닭은 -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일을 유예한다면 나는 실력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지 않은 사람이 되니까. 입맛에 맞지 않아 먹지 않은 음식 따위 정도의 후회만 남는다. 나의 치부를 드러내고 마무리를 짓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실력과 나약한 내 모습을 진창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강박적인 두려움으로 남아 관성처럼 도망친다. 그리곤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날아가는 철새처럼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또 새로운 시작을 도모한다. 그곳은 어떤 계절일지 정확히 모르지만 분명 여기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도망친 이곳엔 동백꽃이 가득이다. 가장 늦게 피어 추운 겨울에 눈바람을 맞으면서도 제 모양 그대로 꼿꼿하게 펴있는 모양새가 참, 아름답다. 색이랄 것도 없는 풀 가지 사이에 빨갛게 피어나고 소리 없이 툭 떨어진다. 가야 할 순간을 아는지 미련 없이 단단한 모양새로 바닥에 덩그러니 남아 제 명을 다한다.


계절은 간절히 원하든 원치 않든 결국 온다.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고, 봄이 왔다면 여름과 가을을 지나 곧 겨울도 온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 겨울을 이겨내는 마음으로 동백꽃처럼 근사한 마무리를 짓고 싶다.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다. 완벽하지 않은 나를 이해하고 할 수 없는 것은 인정하는 태도가 근사한 마무리를 할 수 있는 단순하고 올바른 길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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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메주 글 쑤기 모임의 마지막 날.

매주 글을 쓰진 못했지만, 오늘은 꼭 참석하고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이렇게 시작과 끝을 마무리하는 경험을 하나, 둘 만들고 싶다.




by. 진하



봄이 되면 생각나는 시집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선물해주셨던 시집이다.

이문재 시인의 <지금 여기가 맨 앞>.10년만에 시집을 냈다는 시인의 시집은 그만큼 잘 농축되어 있었다.

첫 장이 계절감이 가득 담겨있는 시들이 많았는데, 그 시들을 읽고 봄을 더 자주 관찰하게 되었다.

봄을 관찰할 시간이 세번이나 있었다. 우리 학교는 거의 자연 속에 있었으므로 학교 안을 이리저리 다니다 보면 연초록빛 새싹들이 돋아나는 것부터, 산수유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노란 꽃을 피우는 것, 말간 연두색 빛들이 조금씩 연초록으로 변하는 것 까지 볼 수 있었다.

새로난 잎은 반짝이고 연하다. 조금 말려있다. 다음날 가서 다시 보면, 말려있던 잎이 펴져있다. 반짝임은 조금 가셨지만 여전히 다른 잎들과 비교해서는 더 연한 초록색이다. 



봄날 입하 - 이문재


초록이 번창하고 있다.

초록이 초록에게 번져

초록이 초록에게 지는 것이다.


입하(立夏) 다.

늦은 봄이 넌지시

초여름의 안쪽으로 한 발

들어놓는 것이 아니다.

여름이 우뚝 서는 것이다.


아니다.

늦어도 많이 늦은

떠났어도 벌써 떠났어야 하는

늦은 봄이 모르는 척

여름에게 자라를 물려주는 것이다.

초록이 초록에게 져주는 것이다.


죽는 것은

제대로 죽어야 죽는다.

죽은 것은 언제나 죽어 있어야 죽음이다.

죽어서 죽는 것이 기적이다.


초록에서 초록으로

이별이 발생한다.

이토록 신랄하고 적나라하지 않다면

이별은 이별이 아니다.

오늘 여기 입하

지금 여기 이렇게 눈부시다.





봄날 2 - 이문재


봄이
새끼발가락 근처까지 왔다.
내 안에 들어 있던
오랜 어린 날이
가만히 고개를 내민다.
까치발을 하고 멀리 내다본다.


봄날이 환하다. 

내 안에 들어 있던
오랜 죽음도 기지개를 켠다.
내 안팎이
나의 태어남과 죽음이
지금 여기에서 만나고 있다.
그리 낯설지 않다. 


봄날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흙냄새가 바람에
바람이 흙냄새에 얹혀진다.
햇살이 봄날의 모든 곳으로
난반사한다 봄날의 모든 것이
서로 반가워한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우리 우리들이다.
새끼발가락이 간지러운 이른 봄날
나는 이렇게 우리다.
우리들이 이렇게 커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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