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생 때부터 늘 운동화에 백팩을 메고 다녔다. 학교 동기들은 등산하러 가냐고 놀렸다. 하지만 집에서 학교까지 통학거리가 1시간이 넘고 하루종일 걸어 다녀야 하는데 잠깐 남자들의 시선을 받겠다고 미니스커트나 힐을 신는 것은 고역에 가까운 노동이었다. 게다가 짧은 치마를 입으면 어디서든 시선을 받으니 소심한 내가 굳이 그런 불편한 일을 자청할 리가 없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사람들이 짧은 치마를 입은 내 다리를 보는지 몰랐는데 삼십 대 후반이 되니 알겠다. 그 싱그러움을 보았던 것이다. 그 젊음이 꽃과 같이 빛나서 자연히 시선이 갔던 것이다. 나는 지나가는 청년들을 보면 가끔씩 몰래 본다. 피곤을 모르는 얼굴, 그 싱싱한 혈색을 들여다본다.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분들은 너도 어리다고 하겠지만.
하여튼 나는 대학 때 운동화를 신고 다니며 각종 공연장 아르바이트, 영화제 스태프, 광고회사 인턴을 했다. 글쓰기 과외를 하며 서울을 하루종일 돌아다녔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 당시에는 내가 글과 관련되어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 답을 찾고 다녔다. 이십 대였으니 그렇게 돌아다녀도 발이 아프지 않았다.
이십 대 후반 첫째 아이를 낳고부터는 온종일 집안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당시에는 아이를 데리고 집 앞을 나가는 일조차 쉽지 않았는데, 골목길 안쪽에 있는 집 밖을 조금만 나오면 차들이 빠르게 달려서 아이와 산책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의 아파트 놀이터에 가서 빌붙기도 싫었다. 좀 데리고 놀려고 주택에 있는 놀이터에 가면 아이들은 없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집 근처에 갈 데가 없었다.
둘째까지 태어나자 나는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외출하기 더욱 힘들어졌다. 그 당시 남편은 집에 잠만 자고 매일 야근할 정도로 바빴다. 어쩌다 남편이 쉬는 날에야 외출을 할 수 있었다. 어느 더운 여름에는 일주일 동안 아이와 단 한 번도 외출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폭염 속 에어컨 아래 있었지만 자유롭게 외출하지 못하니 그 시간이 고역이었다. 그나마도 긴 시간 칩거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집안에 3평 남짓한 마당이 있어서다. 그 공간에서 아이와 하늘도 보고 집 앞 골목에서 킥보드를 타며 놀았다. 그 후에는 코로나로 삼십 대의 꽤 오랜 시간은 집을 맴돌며 지냈던 것 같다.
집 안에 머무는 시간에는 자연히 맨발이거나 마당을 나올 때만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잠깐 외출할 때는 겨울이 아니면 편한 크록스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근 십 년 동안 아이를 키우며 그렇게 지냈다. 그러다 어느 비 오는 여름에는 크록스 슬리퍼를 신다가 스텝이 엉키면서 완전히 넘어지기도 했다. 슬리퍼는 밑창이 갈려 완전히 평평해져 있었다. 슬리퍼도 살인도구가 될 수 있다. 비 오는 장마철 여름에는 슬리퍼 밑창을 필히 점검해 보시길. 새로운 생활방식에 맞게 운동화에서 슬리퍼로, 내 생활반경이 좁아진 만큼 가벼운 신발을 신었던 것인데 언제부터인가 발바닥이 아프기 시작했다. 오른쪽 발바닥 안쪽 들어가 있는 부분이 욱신거렸다. 그 통증이 일주일을 넘자 이건 분명히 뼈를 다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정형외과를 찾아갔다.
발 CT를 찍었는데, 그 당시 설명을 들으면서도 소재라고 생각해서 찍어두었다. 의사의 동의를 얻어 사진을 찍었다. 자세히 보면 왼발과 오른발의 각도가 달라졌는데 왼발은 27.4도, 오른발은 20.2도로 평평해졌다. 발이 평평해진 이유는 나이가 들수록 우리 몸의 근육이 빠지면서 이렇게 발이 평평해진다고 한다.
"내가 운동을 안 해서 그런가요?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발이 평평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의사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씻지도 않은 내 발을 그는 쿡쿡 눌러보며 만졌다. 낯선 손길에 놀라기도 했지만, 정형외과 의사가 발을 보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냄새가 날까 봐 땀이 났다. 다행히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사는 진지하게 내 두툼한 발바닥을 보더니 네이버에서 깔창을 검색해서 권했다. 정형외과에는 이런 깔창이 구비되어있지 않으니 알아서 주문해서 깔창을 신으라는 것이다. 귀찮아서 왜 없냐고 따져 물었더니 병원에 재고를 두기 싫다는 쿨한 답변이 돌아왔다. 깔창, 나의 증상에 대한 해결책을 이것뿐이라고 했다.
나는 의사 선생님이 권한 깔창을 핸드폰으로 찍었고, 전류를 이용한 물리치료를 받고 귀가했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깔창을 넣은 신발을 집에서도 신고 다니라고 권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좀 오버하는 것 같았다. 나는 결국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깔창도 사지 않았다. 못 참을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니었으니까. 집에 돌아와서 친언니에게 병원에 다녀온 일을 이야기하며 하소연을 하니, 언니도 나처럼 같은 발바닥 부위가 아프다고 했다. 언니 역시 아이를 키우며 나처럼 슬리퍼를 찍찍 끌고 다니고 있었다. 세상에. 언니도? 신기했다. 언니와 나는 체형도 식습관도 생활패턴마저 비슷했다. 우연히 전화하면 다른 장소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을 정도로.
우리의 증상을 논의하며 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지금 우리가 겪는 족저근막염의 초기증상이 시작된 원흉은 슬리퍼라는 것. 언니는 내가 정형외과에 다녀온 사연을 듣더니 곧장 스케쳐스 매장에 가서 운동화를 샀다. 나는 여름에 진단을 받은 이후 다시 외출할 때면 슬리퍼 대신 운동화를 챙겨 신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니와 나는 모두 발바닥의 통증이 금세 사라졌다. 이제 정말 다시 운동화를 신어야 하는 것이다. 족저근막염이 얼른 오게 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얼마 전 나는 내 인생 운동화 코르테즈를 다시 구매했다. 코르테즈는 내 인생 첫 나이키 운동화였다. 대학교에 붙었을 때 늘 할인매장에서 가장 저렴한 것을 사주던 엄마는 갑자기 나를 나이키 정식 매장에 데려갔다.
"자, 대학 가는 딸아. 마음에 드는 운동화를 골라라."
그렇게 좋은 것을 사주겠다고 마음먹은 엄마에게 그 당시 가죽으로 된 블랙 코르테즈 신발을 샀다. 지금 코르테즈 신발이 대히트를 치면서 유행한 이후에 블랙 가죽 코르테즈는 사고 싶어도 구하기 어렵다. 거의 20년 전 그 당시에도 그 신발은 내가 기억하기로 십만 원이었다. 나는 그 신발이 좋아서 뒤창이 닳아서 하얀색이 깎이고 검은 중간 부분 밑창이 나올 때까지 신다가 버렸다. 코르테즈만 4-5켤레를 갈아치우며 이십 대 내내 코르테즈만 신었다. 나이키의 오리지널 라인이었던 이 코르테즈가 다시 유행하기 전에는 아웃렛에서 떨이로 삼사만원이면 구할 수 있었다. 코르테즈의 장점은 캐주얼 신발이지만, 패션 신발처럼 가볍게 재킷을 걸치고 차려입을 때도 어울렸다. 나는 두 가지의 역할을 하는 코르테즈의 포지션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작년부터 코르테즈가 다시 유행한 이후로는 코르테즈를 사지 않았다. 너무 비싸졌다. 집에 있는 코르테즈 운동화를 신으며 버티다가 결국 마지막 코르테즈 운동화까지 낡아서 버려야 했다. 코르테즈가 없는 동안 슬리퍼를 전전하다 발바닥이 아프게 된지도 모른다. 블랙프라이데이가 되어서야 12만 6천 원에 코르테즈 신발을 다시 샀다. 원래 싸게 샀어서 바가지를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코르테즈는 한번 사면 삼사 년은 끄덕 없이 신을 수 있다. 누구에게나 선물로든 권하고 싶은 나이키 시리즈다. 코르테즈 유행이 얼른 지나갔으면 좋겠다. 다시 아웃렛에서 사람들이 질린 코르테즈를 마구 사서 쟁여놓고 싶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행처럼 나이키 운동화가 그게 그거일지 모르겠지만 내게 코르테즈는 아주 특별하다. 아직도 그 나이키 매장에서 엄마가 마음껏 골라보라고 하고, 그 검고 반짝이는 가죽 코르테즈를 보았을 때 설레었던 감정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