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지갑을 갖고 있는 이 세상 남자들은 보기보다 순진하다.
음침한 제목이다. ‘비자금’이라하니 ‘뇌물’, ‘불법정치자금’, ‘사과박스’라는 단어가 연상된다. 요즘세대는 비자금과 사과박스를 연결 짓지 못하겠지만 산업화세대에게는 익숙한 조합이다. 5공화국 때 대기업 창고에서 사과박스 무더기가 발견되었는데 사과대신 만 원짜리 지폐가 가득했다. 뉴스시간에 ‘사과상자 한 박스에는 돈이 얼마나 들어갈까?’라며 검증하는 장면이 있었다. 정답은 2억 원으로 요즘 5만 원 권으로 한 상자를 가득채운다면 10억 원에 상당하는 거금이다. 당시 2억 원은 서울에서 아파트를 몇 채 사고도 남을 금액이며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2억 원은 거금이다.
사과박스 사건은 40년 전 일이니 금액에 대한 현실감이 떨어진다. 5공화국 때인 1984년, 초임 연봉 천만 원으로 입사해 원자력발전소에 배치되었다.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달맞이 고개에 위치한 13평짜리 AID아파트가격이 5백만 원, 신입사원 연봉으로 아파트 2채를 구입할 수 있었으니 당시에도 파격적인 연봉이었다. 그러면 사과상자 한 박스는? 한 층에 네 가구, 5층짜리 한 동에 20가구이니 아파트 1동 가격이 1억 원이다. 2억 원이면 아파트 40채 즉 2동을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 승용차 트렁크에 사과박스가 그득했고 심지어는 트럭이 동원되었다하니 천문학적인 검은 돈이 오고갔던 시절이다.
퇴직해서 친구들과 어울려 골프치고 술 먹을 때마다, 또는 애경사가 있을 때마다 부인에게 손 벌리는 것이 쭈글스러우니 부인 모르는 秘資金을 마련하라고 했다. 선배들은 2~3억 원 정도를 말했지만 나는 10%정도 밖에 준비하지 못했다. 秘資金을 준비하려 한 것도 아니고 항상 통장에 남아있는 잔고 수준이었으며 집사람도 알고 있으니 ‘秘’를 빼야하는 공개된 資金이다.
월급쟁이뿐 아니라 퇴직자에게 秘資金이란 것은 부정한 돈이 아닌 개인 용돈이다. 선배들 말대로 때마다 손 벌릴 수 없으니 용돈주머니가 필요하지만 억대규모의 용돈이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은 있다. 물론 多多益善(다다익선)이니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것이 심리적으로도 든든하고 행동반경은 물론 운신의 폭도 넓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집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 사실은 선배님들이 갖고 계시다는 秘資金에 대해 사모님들이 이미 알고 계시지만 모른 채 해주시는 것뿐이다. 유리지갑을 갖고 있는 이 세상 남자들은 보기보다 순진하다.
어느 날 K선배가 밤늦게 카톡을 보내며 혼자 취하도록 와인을 마시고 있다고 한다. 엊그제까지는 제일 행복한 줄 알았는데 갑자기 불행해 졌단다. 열심히 살았기에 앞으로 편안할거라는 믿음에도 의구심이 들어 잠을 설치며 고민하는 중이라 한다. K선배 曰(왈), 갖고 있는 秘資金 규모를 어떻게 알았는지 아들이 전세 옮기는데 수억 원이 필요하다며 손을 벌리더란다. 성공한 직장인으로 퇴직했다고 자부했건만 아들 전세비용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못난 아비로 전락한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단다. 한편으로는 다락같이 오른 집값과 전세 값으로 인해 위협받는 청년세대의 삶이 걱정되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는 秘資金을 모두 아들에게 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무력한 생각에 허탈해지기도 했단다.
K선배는 손이 무척 빠른 분이다. 항상 만나자는 약속시간보다 10분 이상 일찍 나와 식사비용을 미리 계산해 놓는다. 지인들과 만나 당구치고 막걸리 한잔하며 먼저 계산하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는데 秘資金을 털리고 나면 무슨 낙으로 살아가야할지 깜깜하고 걱정이 태산 같아서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집사람이 투자자금으로 사용한다고 통장 잔고를 0로 만든 적이 있었다. 거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잠시 빌려달라고 할 때부터 볼이 부어 심통도 나고 괜한 불안감이 몰려왔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인지 모르겠으나 남자들은 지갑에 찬바람이 들면 본능적으로 어깨가 처지고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K선배와 비슷하게 낚시 가는 것도 걱정되고 책 사는 재미와도 멀어지는 것 같아 괜히 위축되는 기분도 들었다. K선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K선배와 약속하면 나도 덩달아 빨리나간다. 손이 늦는 편은 아닌데 손 빠른 K선배가 약속시간보다 10분 일찍 나오는 반칙을 일삼고 있어 나는 20분 먼저 도착해 미리 식사비용을 계산해 놓는다. 집사람이 약속 지켜 통장에 秘資金을 이체시켰기에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