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속으로

PART 2 슬기로운 환자 생활

by 작가정신

엄마의 손가락 피부염이 재발하셨다. 또다시 부어버려 스스로 병원에 가시겠다고 하신다. 월요일부터는 우리 둘의 병원 일정이 시작이라 오전에 서둘러 다녀와야 한다.


엄마는 20년 정도 사회생활을 하셨다. 젊은 시절부터 쉬시는 날은 밖에 다니시는 것보단 집에서 영화나 신문, 책 보는 모습이 흔했다. 그래서 내가 여행을 그렇게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ㅎ 요즘 특히 병원 가길 싫어하셔서 나 혼자선 모시고 가기가 힘들 때가 종종 있었는데, 이번엔 본인이 먼저 가자고 하시니 그건 다행이지만, 그만큼 아프시다는 것이니 마음이 좋진 않다.


지난번 가보니 이 시국에 피부과에 사람이 많아 넓은 대기실에서 거리 둘 수도 없이 꽤 오래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토요일이라 아침 시간에 다녀 외야겠다는 생각에 설거지를 서두르는데 엄마가 슬쩍 내 곁에 서 계신다.


'또 무슨 일이신가?'


병원 가실 마음이 바뀌신 거면 내 다음 스텝은 어떻게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최숙현 선수는 죽은 거야?"


엄마는 뉴스를 늘 시청하기는 데다 호기심이 생기면 바로 질문하는 아기 같은 면이 있어 뜬금없진 않았다.


"응. 근데 지금 돌아가는 모양이 감독이랑 선수들이 팀 닥터라는 의사도 아니고 물리 치료사도 아닌 임시직을 희생양으로 던지고 끝내려는 것 같아. 정말 나쁜 사람들이야! 죽기 전에 여기저기, 심지어 인권위?에도 호소해 봤는데 모두들 침묵했대. 사람이 죽어야 겨우 조사하는 시늉을 하는데 지금도 같은 무리 중 만만해 보이는 누군가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게 눈에 보여!! "


설명을 하려 했던 나는 좀 흥분했다. 대학 때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우리 학년이 인사성이 없다고 선배들에게 단체로 기합을 받았다. 비 오는 날 운동장을 돌았고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맞지는 않았지만 그 비를 맞으며 무릎 꿇고 앉아 동기들이 맞는 모습을 쳐다보게 했다. 그 일은 학교를 다니던 3년간, 그리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와 우리 학년에 상처를 남겼다. 입학 동기의 절반 이상이 유급을 당해 졸업과 입학을 같이 한 동기는 20명도 안 되었다. 물론 개중에는 그런 성적을 받을만한 동기들도 있었지만, 이전에 좋게 보았던 선배들조차 후배들은 선배들의 말에 복종?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당시 30대 서울대 출신의 교수님들이 있었다는 소문이 이십 대 초반의 나로서는 더 견디기 힘들었다.


당시 사기를 당해 어려웠던 집안 사정까지 겹쳐 나는 과외를 몰아 하며 틈나는 대로 이곳저곳을 다니고, 나와 공통점이 없는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며 온라인에 지금처럼 글을 써대야 했었다. 그래야 버틸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졸업반때 같이 스터디 모임을 했던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그동안 내게 연락을 하고 싶었는데 조교가 연락처를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고. ^^; 학생들에겐 잘도 가르쳐 주더니..! 복학생으로 역시 우리 학년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보수적인 이미지의 그 오빠는 이제 다 잊고 편하게 사는 것 같았다. 우리를 얄밉게 괴롭히던 선배들은 협회의 임원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나도 학교에 오고 나서야 그때 선배들과 교수님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운동을 관두더라도 그래도 살았어야 하지 않아?"


나의 마지막 멘트에 엄마가 고무장갑을 빼고 있는 내 등을 쓰다듬으셨다.


"그래, 그렇게 살아야지. 너는 한 번 죽었다 살아났으니 잘 살아야 해."


3월엔 내가 환자인 것도 모르던 엄마의 한 마디에 울컥했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세상이 변했다고들 하는데, 그럼 선배가 후배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입장이라면 명령이 아니라 부탁할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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