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 대행사의 AE
과거에 날짜나 달 혹은 연도를 계산할 때 사용했던 단어의 총칭. 바로 '천간' 혹은 '십간'의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병신년 및 무술년 등 각 해를 부르는 방식은, 차례대로 해당 해의 신간이 앞 글자에 해당 해의 십이지가 뒷 글자에 붙어 생성된 것이다. '갑을관계' 역시 십간을 어원으로 두고 나온 용어이다. 십간의 첫 번째인 갑과 두 번째인 을을 붙인 것으로 보통 주도권을 지닌 쪽을 갑, 그 반대의 사람을 을이라고 칭한다. 계약상 상위 관계에 위치한 사람(갑)이 하위에 위치한 사람(을)에게 계약관계를 바탕으로 수많은 요구를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홍보대행사는 회사의 이름에서부터 '남을 대신하여 행함'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즉 '갑'인 클라이언트를 대신하여 '을'인 대행사가 홍보를 수행해주는 것. 허나, 이 업계에서는 계약상의 명칭처럼 그렇게 간단한 갑을관계보다 조금 더 복잡한 관계가 형성된다.
홍보 업계에서의 '갑'은 누가 뭐래도 미디어이다. 우리들이 열심히 작성한 보도자료나 기고가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는다면 그 글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대행사의 AE들 뿐 아니라 고객사의 담당자 역시도 모든 미디어의 기자님들과는 항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한 번 사이가 틀어지게 되면, 그 미디어에는 우리의 기사가 다시는 올라갈 수 없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우리 고객사에 대한 부정기사라도 게재가 되는 날에는 온 회사가 비상이다.
그다음 '을'은 당연하게도 고객사의 차지이다. 계약서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고객사는 대행사보다 상위 관계에 위치해있다. 고로 하위에 위치한 대행사에게 많은 요구를 행할 수 있다. "강남역 근처에 1시간 후에 갈 수 있는 맛집 찾아서 2명 예약 좀 해주세요" 등과 같은 얼토당토않은 전화를 받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고객사의 모든 요청은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한다. 요구하는 시간이 업무 시간인지 아닌지 그 요구가 홍보 대행 AE의 업무 스코프에 포함이 되는 일인지 아닌지 등은 중요하지 않다.
'병'은 같은 대행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선임, 상사분들이라고 볼 수 있다. 조금 더 중요도가 높은 일들을 모두 윗선에서 처리해주시면, 위 고객사 측의 황당한 요구와 같은 허드렛일(?)을 처리하는 것은 '정'의 위치에 있는 말단 직원들, 바로 우리의 몫이 된다. 모든 회사가 비슷하겠지만, 대행사에서는 모든 직원들이 거의 매 순간 예민하다. 신경을 써야 할 일들도 많고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미 '갑' 미디어와 '을' 고객사에게 많은 요청을 받은 선배들은'정'인 우리들에게까지 친절하게 일을 가르치고 위로해 줄 여유가 없다.
그럼에도 내가 대행사에서 일을 했던 3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행사는 홍보의 A부터 Z까지를 배우고 직접 부딪혀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PR 업계에서 일을 할 생각이 있다면 대행사 경험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맡은 고객사의 산업군을 분석하며 미디어 리스트를 셋업 하는 것에서부터, 보도자료와 기고 등을 쓰고 기자와 컨택하는 것, 미디어킷 구성하는 것, 간담회 진행하는 것 등등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할 수 있었다. 물론 너무 열 받고 억울한 일들이 투성이인 대행사 생활이지만,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동료들과 함께 '인하우스'를 외치며 버텼던 기억이 있다. (*인하우스란 대행이 아닌, 한 기업의 홍보팀 일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
이러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PR이라는 업무의 토대를 다져, 그렇게 노래 부르던 '인하우스'에 입성했다. 비록 스타트업이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나가는 이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대행사와는 확연하게 또 다른 스타트업의 PR. 앞으로 어떤 기회들이 내 앞에 주어지게 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