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뺏때기에 대한 두 기억이 있다. 하나는 마구잡이로 맞은 기억과 또 하나는 뺏때기 죽을 끓일 때면 형제가 연탄 화덕을 떠나지 못하고 오글오글 모여 빨리 익기를 기다리며 숟가락을 쭉쭉 빨았던 기억이다.
1960년대 초의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북한보다도 한참 뒤처져 있었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두 번째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고 한다. 나라의 살림살이가 이렇다 보니 외국의 이름난 경제학자들은 모두 결코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없는 나라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러한 만큼 국민들은 하루하루의 먹거리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풍족하다 넉넉하다는 사전에만 존재할 뿐이지 일상에서는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는 공허한 언어에 불과했다.
이처럼 극도로 궁핍하다 보니 몸뚱이 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림에 지쳐 휑한 눈으로 하루 종일 먹을 것을 찾아다니지만 허기진 속을 채울 그 무엇도 없었다. 외국에서 원조를 받은 밀가루가 나올 때면 동네 별로 일정량을 배정하여 마을 개량 사업에 참여한 사람에게 할당량을 배급해주었다. 마을의 확성기에서 언제 개량 사업을 한다고 방송을 하고 그날이 오면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삽이나 곡괭이를 들고나가 장부에 이름부터 올렸다. 뚜렷한 목적 없이 배급을 받기 위해 일을 하다 보니 건성건성 일을 하다 틈만 나면 앉아 쉬는 시간이 더 많았다.
배급받은 밀가루로 굶주림을 잠시 채워도 내일이면 또 텅 빈 쌀독을 멍하게 한숨으로 휘저어야 했다. 언제 또 배급이 나올지 몰라 먹을 것을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게 몸에 밴 일상이었다. 인터넷에 그때의 사진을 검색해 보면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쓴 청년이 몸에 구직이란 글자를 목에 걸고 전봇대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절대적으로 궁핍했던 시절의 한 단면이었다.
그때는 국내 산업 기반이 워낙 빈약하여 외국에서 원조를 받지 않으면 나라의 살림살이를 꾸려 나갈 수가 없었다. 각국의 원조 물품이 배로 들어왔고 한 번 들어오면 작고 좁은 부두에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역 장비가 없으니 머리에 띠를 두른 일꾼들이 지게와 큰 통을 앞뒤로 매달은 긴 나무를 어깨에 걸치고 개미떼처럼 오가며 하역을 하였다. 고구마 뺏때기는 부피가 크고 부두 내에 쌓을 공간이 없어 바깥 공터에 군데군데 야적을 해놓았다.
배곯는 사람들에게는 뺏때기가 귀한 먹거리라 이를 훔치는 사람이 많았다. 이렇게 많은 양이 다 어디로 가는지 시장에서도 팔지를 않았고 시장을 지날 때면 아주머니가 직접 만들었는지 함지박에 담아 파는 모습을 어쩌다 본 적이 있을 뿐이다.
첫 번째 기억
어머니가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모르지만 뺏때기를 구해 오시는 날이면 잔칫날이 된다. 많지 않은 양일지라도 죽을 끓이면 모두가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달짝지근한 단맛과 포만감을 채우기 위해 몇 그릇을 먹어도 사실 그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뺏때기에 옥수수를 넣어 같이 끓여 먹는 날에는 친구가 놀자고 불러도 못 들은 척하고 나가지 않는다. 맛있는 죽이 눈앞에서 뽀글거리는데 밖에 나간다고, 어림이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뺏때기 죽을 끓일 때면 미리부터 침을 꿀떡꿀떡 삼킨다. 빈 숟가락을 쭉쭉 빨면서도 괜히 신이 나서 연탄 화덕 주위를 왔다 갔다 한다. 시선도 멀리 가지 못하고 솥에 매달려 어서 빨리 익기만을 기다린다. 무덤덤한 시래기죽과는 달리 옥수수를 한 줌 넣은 배때기 죽은 휘저어 낱알을 헤아려가며 먹었다. 한 입 떠먹을 때마다 단맛이 살살거리고 입안에서 톡톡 터지듯 씹히는 맛에 취하여 배가 불러도 숟가락 놓기가 힘들었다.
행여 죽이 바닥에 눌어붙을까 나무 주걱으로 냄비 바닥을 쉼 없이 젓고 있는 엄마의 이마에는 진작부터 땀방울이 송글 거리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비어있는 밥통에서 빨리 안 준다고 잔뜩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어머니 땀방울이 눈에 들어올리가 만무하였다. 화덕에 빙 둘러앉은 우리 형제는 죽이 왜 이리 빨리 익지 않는지 속이 탄다. 기다려야 하는 줄 알면서도 서로 쳐다보며 말을 건넨다. “아직 멀었나.” “너무 그라지 마라. 이제 쪼그만 더 있으모 된다아이가. 쪼메마 참아라.” 하나마나한 물음에 뻔 한 대답으로 서로를 달래가면서 연신 침을 호로록 삼킨다. 그럴 때마다 목젖이 크게 울렁거렸다.
시뻘건 연탄불을 깔고 앉은 커다란 냄비가 뜨거워질 때면 나무주걱으로 바닥을 슬슬 긁어준다. 죽이 커다란 방울이 푸하고 푹 터지면 분화구 같은 모양을 만들어 낸다. 죽 표면 곳곳에서 폭죽이 터지면 뜨거운 용트림이 일어난다. 죽이 익어 뻑뻑해질수록 주걱을 젖는 엄마 팔에는 힘이 들어간다. 솟는 방울도 두꺼워진다. 솥 안에서 난리가 난 듯 방울이 푹푹 터지기 시작하면 숟가락을 들고 있는 급한 마음은 벌써 뜨거운 솥 안에 앉아 있다.
탱글하게 마른 옥수수 알갱이와 바싹 말라 깨지는 고구마 뺏때기로 죽을 끓이면 익을수록 점점 양이 불어나면서 나중에는 주걱이 돌아가지 않을 만큼 뻑뻑하게 된다. 틈틈이 물을 부어가며 저어주기에 다 익을 때쯤이면 그야말로 큰 냄비에 가득하였다. 이렇게 부풀어진 만큼 모두가 푸짐하게 먹을 수 있어서 엄마는 처음부터 큰 밥그릇에 넘칠 듯 가득 담아 준다. 시커멓게 때가 낀 손톱으로 뜨거운 밥그릇을 밀어 받치면서 끌어안고 후후 불어가며 옆 볼 겨를 없이 빠르게 한 그릇을 후딱 먹어 치운다.
뺏때기의 썩은 부분은 끓여도 풀리지 않았다. 맛에 취해 정신없이 먹다가도 물컹하고 씹히면 단번에 역겨운 쓴맛이 확 밀치고 올라와 순간적으로 얼굴이 찡그려진다. 썩은 부위를 먹을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은 아직도 보지 못했다.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목이 탁 잠긴다. 얼른 뱉어도 역겨운 쓴맛이 오랫동안 입안에 남아 있어 물로 입안을 헹구곤 했다.
배가 불러도 숨을 길게 뱉어내면서 배를 힘껏 끌어 당겨 홀쭉하게 만들어 엄마에게 내보인다. 엄마는 모르는 척 씨익 웃으면서 처음보다는 조금 적게 또 한 그릇을 퍼준다. 제 자식 입에 들어가는 데 아까울 게 있으랴, 나는 엄마가 모르시는 줄 알고 “아~싸.” 하며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정신없이 먹다 보면 배가 늘어나 탱글탱글거려도 숨이 쉬어지면 억지로 조금 더 먹는다. 일곱 식구가 이렇게 먹으니 큰 냄비에 가득하던 죽은 그야말로 둑이 터진 저수지 바닥 마냥 속내까지 다 드러낸다. 죽이 있었다는 흔적만 냄비에 휑하게 남아 있다. 그제야 배부른 아쉬움에 트림을 꺼~억하고 일어서면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당기고 아프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밖에 나가 뜀박질을 몇 번만 하면 땡글한 배가 쏙 들어가고 속이 금세 편안해졌다. 한 시간쯤 지나면 언제 먹었냐 하듯이 배가 쏙 들어가 처음처럼 홀쭉해진다.
고구마 뺏때기가 어려운 시절에 주린 배를 채워주던 귀한 먹거리이었지만 이제는 과거의 음식이 되어 기억에서 희미해져 간다. 모두가 밤낮으로 땀 흘린 덕분에 이제는 국가의 위상이 높아졌다. 국민의 일상생활이 전반적으로 안정되고 물질적인 풍족함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두 번째 기억
빈 숟가락을 쭐쭐 빨 만큼 맛있게 먹던 고구마 뺏때기가 부둣가 근처 빈터에 여기저기 둔덕처럼 쌓여 천막으로 덮어 있었다. 한 무더기만 하여도 동네 사람들이 일 년을 먹어도 될 만큼이었다. 넓은 공터에 말뚝을 세워 철사로 얼기설기 엮어 울타리를 치고 경비 아저씨가 순찰을 돌았다. 훔쳐가는 걸 막으려고 지키고 있었지만 애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애들 중에서 동작이 굼뜬 아이를 철조망 밖에 세워 놓고 순찰 도는 아저씨가 나타나면 “빨리 도망가라” 하고 고함을 지르게 하였다. 보초서는 아이의 고함 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은 자기 재량껏 이리저리 흩어져서 철조망 밖으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터득해서 모두 다 알고 있다.
순찰 도는 아저씨가 아이들을 잡으려고 쫓아오면 멀뚱히 서 있다가 눈앞에서 확 흩어져 버리기에 누구를 잡아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면 날쌘 돌이 마냥 도망을 가버리기에 뻔히 보고도 잡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은 한결같이 몸이 재빠른 애들이라 까투리처럼 요리조리 도망을 다니면서 술래잡기하듯 약을 올리다 도망을 가버리기에 웬만한 어른은 제풀에 지쳐 주저앉았다. 도망가지 못하고 잡히면 한 동안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고 놀이에도 끼워주지를 않아 기를 쓰고 도망가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잡을 수가 없었다.
철조망 밖에 보초까지 세워 놓고 세 명의 아이들은 주변을 살피다 철조망을 들고 뽈뽈거리며 기어들어 간다. 철조망을 통과하면 주위를 다시 살필 여유가 없다. 잽싸게 고구마 뺏때기를 덮어놓은 천막의 바닥을 들추어 그 안으로 쏙 들어가야 들키지 않는다. 그리고 귀를 세운다.
주위가 조용하면 그때부터 재주껏 호주머니에 가득 담아 나온다. 보초를 선 아이에게 한 움큼씩 건네주면 모두 엇비슷해진다. 배분이 끝나면 모두 성공을 자축을 하면서 작전을 성공한 무용담을 주고받으며 헤헤거린다. 딱딱한 뺏때기를 송곳니로 조금씩 깨물어 먹으며 또 다른 놀이를 찾아서 온 동네를 헤매고 다녔다.
몇 번을 훔쳐 나오다 한 번은 들켰는데 하필이면 거칠게 욕을 하는 사나운 아저씨에게 잡혔다. 천막 안에서 애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가만히 있어야 할 천막이 꿈틀꿈틀 거리는 것을 순찰을 돌다 보고 달려와 천막을 눌러가며 닭장에서 닭 잡듯이 한 명씩 잡아내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간 세 명이 모두 꼼짝없이 잡혔다. 밖에서 이를 본 보초병은 안절부절 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초소 안으로 끌려 들어간 세 명은 정말 흠씬 두들겨 맞았다.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이때를 떠올리면 몸이 움찔거리고 지리 하다. 호주머니 있는 빼때기를 다 털어내고 하여간 실컷 두드려 맞았다. 아껴 먹으려고 만지작거리던 사탕 세 알까지 빼앗겼는데 이 아저씨가 사탕을 다 깨 먹으면서 인정사정없이 때렸다. 정말 되뇌이기 싫은 기억이다. 집에 와서는 맞았다고 하지 못하고 산비탈에 뛰어 내려오다 넘어져서 그렇다고 했지만 그날 몸살을 심하게 하였다.
이후로는 고구마 뺏때기를 훔치러 가지 않았다. 훔친 것에 대한 변명일 수도 있지만 장난감이 없던 당시 애들은 무엇이든 호기심을 채울 놀이로 삼았고 훔쳤던 전부를 합쳐봐야 공기밥 그릇만큼의 양도 안 된다. 바지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조금씩 깨 먹는 정도이니 그 양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아무리 애들이 잘못했기로서니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때리다니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
그때는 사회적으로 주먹질이 다반사였고 생활이 절박하여 누구도 애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생존이 다급한 때라 아이들은 맞아도 어디에도 하소연할 때가 없었다.
이제는 어린 시절이 물 흘러가듯이 지나가고 수많은 기억도 점점 옅어져 가는데도 그때 맞은 기억만큼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아이들은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성장한다고 하지만 지우려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