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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Jul 11. 2020

보라

옥수수도 보라색이 맛있다. 혹은 보라와 하양이 골고루 썩여 모자이크처럼 명암이 돋보이는 옥수수도 맛있다. 여름 옥수수가 키가 커지면 내게도 온다. 오늘 첨 만났다. 아침부터 달콤한 냄새가 난다. 소금을 조금 넣기도 하는데 오늘은 왠지 달달한 게 끌렸다. 소다 대신 설탕을 일부러 더 많이 넣었다. 옥수수 알이 물컹해지도록  삶고 싶었는데 꺼내고 보니 조금 더 푹 삶을걸. 했는데 나름 적당히 쫄깃해서 더 맛있다.


도시에서 태어나 줄곧 자라고 있는 내게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에서 지낸 시간들은 보석같이 빛나는 행복 같다. 기회가 되면 그 이야기를 풀어써보고 싶은데 쉽지 않아서 두서가 없지 싶다. 문득 옥수수를 보니 할머니 생각이 난다. 유난히 할머니를 좋아했던 나는 할머니가 오시면 젤 먼저 몇 밤 잘 거야, 한밤. 두밤. 세밤. 오래오래 자고 가야 돼. 그러면 할머니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오냐, 그랬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달려왔는데 안 계셨다. 그날은 너무 슬퍼서 할머니 베개를 끌어안고 울곤 했다.


태양도 바삭한 어느 여름. 할머니 집 뒷마당에 가면 작지만 뭔가 푸른 것들이 듬뿍 심긴 밭이 뒷문 옆에 있었다. 마당 귀퉁이를 네모로 만든 그곳은 해가 넘치도록 쏟아졌다. 사방을 빙 둘러 심긴 옥수수는 내 키보다 커서 그사이를 비집고 들여다보면 고랑마다 고추가 주렁주렁 자라고 있었다.  밥때가 되면 할머니 따라 조그만 바구니를 들고 고추를 따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고추보다 가지를 더 많이 따서 몰래 아닌 척 고추나무 사이에 꽂아두었다. 할머니는 금방 그걸 아시고도 모른 척했을 것이다. 따로 반찬이 필요 없이 내가 딴 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으면 참 맛있었다. 밭에서 가져온 것들로 할머니 손맛으로 나날이 건강해지는 여름이어서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내 얼굴이 보름달처럼 크고 밝아와서 친구들이 몰라보게 눈부셔했다.


할머니 집 마당 담벼락 쪽으로 가면 샛노란 호박꽃이 활짝 핀 지붕 아래 위태롭게 정낭이 있었고 그 옆으로 냄새는 나지만 흙이 좋아하는 거름이 산처럼 있었다. 그리고 마당 한가운데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들이 팔랑 인다. 그 줄에 내 옷도 있었다. 할머니 옷만 널린 그곳에 내 옷이 널리면 이 집 손녀가 방학이라고 왔구나. 하고 내 흔적은 금세 먼 동구 밖에서부터 마을로 알려진다. 자주 그 마을 친구들이 마을 어귀에 나와 나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 사람들이 손 흔드는 모습이 희미하지만 사랑스럽게 겹친다. 늘 할머니가 오셔서 나를 데리고 가실 때가 많았는데 중학생이 되면서는 왠지 혼자 가고 싶어서 혼자가 기도 했다.


시외버스에서 내려 마을까지 걷다 보면 길 옆으로 보이는 모든 풍경이 내겐 어쩐지 낭만 같았다. 어떤 알수 없는 낭만을 알 때즘이었을까. 뜨겁게 내리쬐던 태양도 밉지 않고 파란 하늘에 매미소리만 정겹게 들렸다. 다리 아래 강물이 흐르고 키 큰 나무들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도 고왔다. 어쩌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때부터였지 싶다. 내 감성의 일정 부분을 채워준 시골생활은 내 보물처럼 심겼다. 그렇게 어릴 적 긴 방학을 보낸 순한 시골의 향기가 그립다. 지금은 안 계신 할머니가 보고 싶은 날이다. 극진하게도 우리를 사랑하셨던 할머니 냄새가 난다. 그리고 할머니가 삶아주셨던 옥수수 냄새를 타고 파고드는 보랏빛 그리움이 모락 피어난다. 그 사이 먹은 내 시간들을 익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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