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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3대 맛집은?

산채정식·닭죽·손두부유명...‘백제장’·'닭죽촌'·'오복손두부'

원고 마감을 하려고 데스크톱 앞에 앉았는데 지인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남한산성인데 맛집 추천을 해달라는 것이다. 맛 칼럼니스트를 하다 보니 이런 민원(?)이 적지 않다. 문제는 ‘민원인’ 생각과는 달리 필자가 가진 정보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필자는 맛집을 찾아서 가기보다는 식사 때가 돼서 불쑥 들어가거나 약속이 잡힌 식당서 만족한 식사를 했을 때 큰 취재 없이 소감을 적는 수준이다.      


식당과 음식, 식재료 이야기도 쓰지만 지역의 장소성과 역사성에도 방점 하나를 찍는 글이다. 그래도 최대한 아는 곳을 추천하지만 잘 모르는 지역은 ‘빅 데이터’를 활용하라고 한다. 말이 빅 데이터지 실상은 네이버나 구글, 다음, 페이스북 등에서 검색해 보란 의미다. 실패를 줄이는 방법이지만 요즘은 워낙 ‘체험단’의 글이 넘쳐나는 세상이라 그것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그래서들 물어보곤 하는데, 좋은 정보를 주지 못해 늘 송구하다.  그런 면에서 이번 남한산성에서 연락을 준 지인은 운이 좋았다. 단박에 떠오르는 식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적인 공간인 남한산성의 서사(敍事)가 고구마 줄기처럼 뒤 따라왔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산성이다. 통일신라시대 축조된 것이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지키는 외곽 성곽 기능을 했다. 조선시대 축조됐을 것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으나 발굴조사 결과 신라 주장성의 옛터로 추정되면서 축성 시기가 대폭 거슬러 올라갔다.     


주장성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의 군대가 돌아가지 않고 평양에 주둔하면서 신라를 침입하려는 의도를 보이자 방어 역할을 할 성의 필요성 때문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1999년 토지박물관이 남한산성 행궁터를 발굴하면서 통일신라시대 인화문토기와 기와 조각이 대량으로 됐다. 이 때문에 주장성이 남한산성이라는 것을 뒷받침하게 됐다.      


1592년의 임진왜란과 인조 2년(1624)에 발생한 이괄의 난 때 왕이 수도를 비우고 파천하는 결과를 맞이한 후부터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본격적인 수축 논의가 제기됐다.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것은 인조 2년부터 4년까지로 주로 승군과 군인이 동원됐다. 이들은 어염이나 전결, 둔전 등을 통해 군량을 확보해가며 2년 4개월 동안 축성했다.  


조선시대 축조 당시 성가퀴라고도 부르는 여장이 1,700첩(堞)이고, 4문과 8암문이 있다. 성안에는 관아와 창고 등 유사시에 대비한 모든 시설을 갖추고 7개의 절까지 세웠다. 인조 때부터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 확장은 계속돼 임금이 거처할 행궁은 상궐 73간 반, 하궐 154간이었다. 1711년에는 종묘를 모실 좌전과 사직단을 옮길 우실도 세웠다.     


남한산성은 1950년대 중반 우리나라 최초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1960년대 도립공원으로 강등(?) 됐지만 관광객이 꾸준히 늘었다. 1973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서울, 인천, 경기도 중·고등학교 수학여행지, 소풍지로 각광받았다. 1963년에는 사적 제57호로 지정됐다. 2014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유네스코 총회에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원주민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요릿집이 4개 정도 있었다. 이중 순수 요릿집(음식점)은 2개고, 나머지는 기생과 음식을 파는 술집에 가까운 곳이었다. 관광객이나 지나가던 사람들이 기생을 보러 기웃 거리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서울 사람들이 유람을 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집들이 생기고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은 잠을 자고 갔다.     


60년대 수학여행지로 각광 식당 발달 계기

  

남한산성은 70년대 학생들 수학여행지와 관광지로 각광받았다.

19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 말까지 수학여행단 학생들이 트럭이나 버스를 타고 동문에 내려서 걸어왔다. 주로 서울, 인천 등에 있는 학교에서 왔다. 당시 대중교통은 광지원리에서 내려 동문 쪽으로 20리(7.8km)를 걸어 들어와야 했다.      


과거 남한산성으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은 여행 경비를 쌀로 가져왔다. 학생들은 1인당 쌀 한 되씩 가져와서 절반 정도는 식당에서 식사용으로 썼다. 식당은 이 쌀로 학생들에게 밥을 지어주고 나들이를 갈 때 점심식사로 주먹밥을 만들어 줬다. 나머지 절반가량은 식당 수입으로 잡았다. 쌀이 환금성이 있던 시대였다.      


이때 학생들이 주로 머물렀던 곳이 백제장, 반월정, 산성원 등 세 곳이다. 또는 인근 가정집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여주 신륵사로 갔다. 식당은 이들에게 아침 식사를 해주고 점심은 주먹밥을 나무 도시락에 싸서 보냈다. 봄, 가을 수학여행단이 오면 남한산성 식당가가 정신없이 바빴다.      


학생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반찬을 준비하는 데 야채나 나물류는 주로 종로에서 사다 썼다. 일부는 산성 안 텃밭을 일궈 재배한 것을 사용했다. 백제장 주인은 육영수 여사 고등학교 후배라서 박정희 대통령도 종종 들렀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비슷한 다른 곳과 달리 도로포장이 잘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산성 1호 음식점 ‘백제장’ 

남한산성 1호 음식점 백제장의 정식 한상 차림.

남한산성 1호 음식점은 남한산성 중턱에서 1966년 문을 연 백제장이다. 업주는 9대째 남한산성에 살고 있는 토박이다. 조상 중에는 인조 임금 때 훈련도감(정3품)을 지낸 이도 있다. 그래선지 산채를 기본으로 하는 전통 궁중한정식을 하고 있다.     


한옥 앞마당에는 오래된 고목과 국전 대상 조각품이 전시돼 있었는데, 최근 상황은 정확지 않다. 재래 방식으로 음식을 보관하는 토굴도 있다. 제철 산채 나물과 생선, 닭볶음, 찌개 등 25가지의 반찬으로 구성된 산채정식이 주력 메뉴다. 숯불 불고기와 더덕구이, 옛날 맛 녹두빈대떡 등은 추가 메뉴로 주문할 수 있다. 초등학생은 반값만 받는다.     


1968년 문을 연 반월정은 백제장 뒤쪽에 있었다. 백제장 여주인의 사촌동생이 차렸다. 100년 넘은 한옥을 개조한 한식당이다. 15여 가지 제철 산채 나물과 된장찌개를 곁들인 불고기산채정식이 인기 메뉴다. 커다란 도가니에 삼계탕과 죽을 함께 끓여낸 닭도가니와 닭볶음탕도 많이 찾는다. 이 집은 산성리에서 가장 부유해 인근 마을 주민들 중 이 집 돈을 빌려 쓰지 않은 집이 없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지금은 반월정 카페로 변모했다.      


은행나무집은 한국전쟁 때 월남한 실향민이 1966년 로터리 주차장 터에서 주점으로 시작해 음식점으로 전환했다. 당시 시발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어 광주읍내에서 광주막걸리를 실어와 독점적으로 전통음식마을에 공급해주는 대리점 역할을 했다. 토종닭과 오리를 사용한 한방도가니, 한방백숙, 닭볶음탕, 오가피백숙, 엄나무백숙 등이 유명하다.     


70년대 닭요리 등장 백숙거리·닭죽촌 등 형성

  

70년대 등장한 닭요리가 지금은 닭죽촌으로 발전해 성남시 음식문화특화거리로 지정됐다. 사진은 유정집 닭죽.

남한산성 전통음식마을에서 닭요리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다. 직접 닭을 키워 잡을 수 있었던 시절이라 관광객에게 집 닭요리를 해주던 것이 오늘날 남한산성의 대표 메뉴가 됐다. 남한산성 행궁 앞은 백숙거리가 있고 버스를 타고 조금 내려오면 닭죽촌이 형성돼 있다.     


70년대 당시 남한산성 계곡에는 닭죽만을 취급하는 음식점들이 한 두 집 생겨나면서 한때는 40여 개까지 늘어났다. 1998년경 경치가 좋은 지금 자리로 이전하면서 30개소가 밀집해 있는 민속마을로 닭죽촌을 이루고 있다.      


이곳 특징은 우리 고유 미를 살린 전통적인 한옥형태로 건물 외관을 만들었고 모든 음식점들이 닭죽만 취급하고 있는 특화거리다. 특히 단대동으로 옮긴 이후 닭죽을 닭도가니로 발전시켰고 닭볶음탕, 유황오리, 더덕구이, 아귀찜 등 메뉴를 발전시켰다. 이들과 함께 남한산성 순환로를 따라 근처에 16개 업소가 흩어져 있으면서 닭요리 명성을 잇고 있다. 성남시는 2012년 닭죽촌을 음식문화특화거리로 지정했다.      

 

80년 역사 주먹두부로 유명한 ‘오복손두부’ 

80년 역사의 오복손두부와 주력 메뉴인 주먹두부.

남한산성에는 산채정식, 닭요리와 더불어 두부가 유명하다. 두부는 건강식이란 이미지가 강해서 대부분 등산길 초입에 한 두 집정도 있다. 오복손두부는 두부 제조 역사가 80년가량 된 유서 깊은 두부집이다. 이 집은 특히 이름만 들어도 유추가 가능하고 모양이 독특한 주먹두부로 유명하다. 두부 제조 역사는 현 업주 모친이 해방 이후 생계유지를 위해 두부를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당시 어린 아들이 해온 나무로 무쇠 솥에 불을 지폈고 맷돌로 갈아낸 맑은 콩물을 끓였다. 매일 새벽 2시면 어김없이 굴뚝에 연기에서 연기가 났고 해가 떠오르는 새벽이면 주먹 모양의 두부가 남한산성 곳곳에 배달됐다.     

18시간 동안 불린 콩을 갈아 장작불로 끓여낸 후 안면도의 꽃지에서 가져온 간수를 넣어 뭉글뭉글하게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순두부를 면포에 두세 겹 싸서 주먹만 한 크기로 한 모씩 모양을 굳혀낸다. 그 모양 때문에 주먹두부라고도 불리는데 간수 특유의 씁쓸한 냄새가 없고 부드러운 질감과 구수한 맛이 난다. 순두부 국물의 고소한 맛도 일품이다.     


이 집 두부 맛에 익숙한 남한산성 주민들은 성 밖의 목판에 굳혀낸 두부는 냄새가 나서 못 먹겠다고 한다. 손두부는 남한산성 전역에 배달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전통 방식을 고수해서 고소한 맛이 좋았다. 지금도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고 한 시간 이상 콩물을 끓여내 간수를 넣는다. 과거엔 주로 인근 음식점에 두부를 공급해 주던 것을 ‘오복손두부’ 창업 이후 공급을 중단했다.     


남한산성은 과거 회사 영업사원이라면 한 번쯤은 만사 제쳐 놓고 낮부터 백숙 한 그릇 시켜 놓고 하루를 보낸 추억이 있을 것이다. 당시야 영업을 월말에 ‘밀어 넣기’로 숫자를 맞추던 시절이라 하루 정도 노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남한산성, 행주산성, 좀 멀리는 소래포구 등이 낮부터 호황을 누렸던 시절이다. 요즘 그렇게 했다가는 죄다 사표를 써야 할 시대다. 대신 도로시설이 잘돼 있고 자가용과 버스 등 교통이 편리해 영업사원의 빈자리를 관광객과 등산객, 식객이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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