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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CON Jun 02. 2017

꽃개 네트워크 33 잘생긴 웰시코기의 즐거운 하루

두어 번의 평범한 산책과 두어 번의 특별한 외출에 관하여. 


잠이 깨면 악마의 유혹을 느낀다.

안 일어난 척 다시 자도 녀석은 모를 텐데.

침대 밑을 보면 녀석도 나를 보고 있다.


끄응.

악마와 타협해 잠을 청하면 이번엔 녀석이 쉐킹을 한다.


푸다닥!

잠 깬 거 다 아니까 잔머리 굴릴 생각 말라는 듯.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시계를 보면 5시 52분.

새벽 6시면 한참 어두울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요즘은 해가 길어져 훤한 대낮 같다.

겨울 때보다 기상이 한 시간 앞당겨진 느낌.

비닐봉지를 챙겨 나간다.


꽃개는 거울을 이해한다. 엘리베이터의 반사되는 면을 통해 우리를 볼 줄 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줄을 채운다.

높은 탑층에 사느라 가능한 여유.

출근하는 사람을 볼 때도 있고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볼 때도 있다.

꽃개는 청소하는 그분을 좋아하지 않는다.

"꽃개야!" 하고 부르면 꼬리를 넣고 피한다.

강하고 큰 목소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단에 들어서면 한 발을 들고 오줌을 눈다.

보도블록이 깔린 인도에는 누는 일이 거의 없다.

지난 겨우내 꽃개가 오줌 눈 데만 잡초가 무성하다.

오줌을 맞은 가운데 포인트만 비고, 그 주변이 테두리를 두른 것처럼 무성히 자랐다.

어느 날 일하는 아저씨가 잡초 제거를 하고 나자 그 흔적도 말끔히 사라졌다.

덕분에 똥을 치우기도 한결 쉬워졌다.

까치 - 알고 보면 맹금류인 녀석들이 깍깍깍 맹렬히 짖는 영역 안으로 꽃개가 어슬렁 진입한다.

아침부터 짖어대는 까치를 보면 녀석들도 나름의 법칙에 입각해 치열한 삶을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꽃개는 까치가 깍깍대다 물러난 한복판에서 응가를 눈다.

허리를 옹크려, 코를 연신 킁킁대며.

나는 녀석의 항문으로 응가가 탈출하는 장면을 본다.

보게 된다.

더럽다는 걸 알면서도 피할 수 없다.

저걸 봐야 녀석의 컨디션을 알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음, 오늘은 상태가 좋아 보이는군.
음, 오늘은 똥 상태가 안 좋은데... 어제 간식을 많이 먹었나?

꽃개는 나를 위해 얼른 들어가는 편이다.

1년 전에는 이 시간에도 산책했다.

하지만 요즘은 내가 졸려한다는 걸 아는지 녀석이 앞장서서 집으로 간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만나면 그분은 "꽃개야!"하고 부른다.

꽃개가 피하면 당신도 포메를 키운다고 말한다.

꽃개가 나를 보고 턱을 든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줄을 풀어준다.

주차장이 연결된 B1과 1층을 제외하면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아파트 주민은 거의 없으니까.

다른 층은 네 세대가 살지만 탑층은 두 세대만 산다.

엘리베이터에서 튀어나오는 꽃개를 보고 놀랄 사람은 거의 없다.

집까지 뛰어가 디지털도어록을 열라고 터치다운을 하면 컨디션이 아주 좋은 것이다.

문을 열어주면 맹렬히 뛰어들어간다.

형아 방으로 들어가 침대 모서리에 앞발을 붙여 아들이 잘 자는지 확인한다.

며칠 전 아들이 코감기에 걸려 비실거릴 때는, 뒤척거릴 때마다 꽃개가 벌떡 일어나 형아 방으로 쫓아가 확인하곤 했다.

걸레에 물을 묻혀 발 닦자고 하면 녀석이 엎드려 벌러덩 배를 깐다.

기특한 게 아니라 영악한 거다.

발 닦는 다음 스케줄이 식사란 걸 아니까 빨리 해치우자 이거다.

이 시간만의 특별 서비스로, 다른 시간대엔 이렇게 발 닦으라고 배 까주는 일 없다.


껌을 밟은 적도 있고 똥을 밟은 적도 있다.


누워있을 때 뒷발을 보면 먹기 좋은 닭봉이 떠오른다.

 

마지막 뒷발을 닦으면 벌떡 일어나 턱을 치켜든다.

사료를 꺼내 한 컵만 준다.

허겁지겁 먹는 꽃개.

예전엔 이 시간에 주지 않았다.

지난봄부터였나, 새벽에 일어나 볼일을 보면 다시 잠을 청해야 하는데, 배고플까 봐 포만감에 잘 자라고 한 컵씩 주게 됐다.

사료는 원래 아침저녁으로 두 컵씩 줬다.

요즘은 새벽에 한 컵, 아침에 한 컵, 저녁에 두 컵 준다.

아내가 아들을 학교에 보내면 10시까지 조용한 아침을 보낸다.

움직이지 않는다.

눈도 뜨지 않는다.

간혹 TV를 볼 때도 있지만, 움직임은 없다.

10시 30분 산책은 아내가 책임진다.

산에 갈 때도 있고 아파트 광장에서 프리스비를 할 때도 있고 애견 공원에 갈 때도 있다.



꽃개는 풀을 뜯는다.

와작와작 씹어먹는 수준은 아니고, 살짝 맛을 보는 수준.



음, 이건 알맞게 잘 익었는데.


뒤집어 비비기.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업체에 맡겨 목욕을 시킨다.

2주 전에 4만 원을 들여 목욕을 시키고 부분 미용을 했다.

개들의 사생활은 반자본주의적이다.



기흥 레스피아 호수공원에 애견 공원이 조성됐을 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

땅에서 올라오는 싱싱한 냄새를, 꽃개는 밝힐 줄 알았다.



꽃 - 개.



10시 30분 산책은 최소 30분에서 최고 한 시간이 걸리는 긴 외출이다.

꽃개는 집에 돌아와 쉰다.

쉬도 하고 응가도 해서 오후 3시까지 푹 쉰다.


먹을 것에 대한 꽃개의 집중력은 숭고하다.


아들이 수학에 이렇게 집중하면 천재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개들은 무언가 되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없다.


오후 3시는 커피 타임.

카페라떼는 뱃살의 원흉으로 지목됐다.

슬슬 더워지기 시작해 칼로리가 제로에 가까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갈아탔다.

카페라떼와 달리 설거지의 부담이 적어 텀블러를 들고 간다.

꽃개는 아내가 리드한다.

커피를 기다릴 동안 꽃개는 가게 앞에서 기다린다.

내가 손바닥에 얼음을 들고 나오기를.

없다고 손바닥을 펴서 표시하면 냉큼 돌아선다.


개들은 개이기만 하면 된다. 신앙심처럼 깊고 순수한, 먹이에 대한 개들의 염원.


간식을 이용해 꽃개를 다루는 아내의 솜씨는 탁월하다. 나에게 꽃개는 그저 개이기만 하면 된다. 


커피를 사서 돌아오면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온다.

디지털도어록이 삑삑삑 눌리는 소리에 꽃개가 껑 짖는다.

요즘 이 버릇이 강화됐다.

얼마 전에는 소독하는 아주머니가 방문했는데 그때도 꽃개는 짖지 않았다.

낯선 사람에게는 짖지 않는다.

가족인 우리한테만 짖는다.

아들이 '아빠, 식사하세요' 알리러 오면 그때도 짖는다.


밥 먹어!

이런 느낌?

문제는 꽃개가 꽤 귀여워 보여도 짖을 땐 소리가 꽤 묵직하고 크다는 것.

깜짝깜짝 놀란다.


아내는 꽃개의 정면 샷을 좋아하지 않는다. 볼이 홀쭉해 늙어 보인다나. 볼이 홀쭉한 건 사실이다.


이렇게 귀여운 녀석이 껑 짖을 땐 대포를 발사한다.


오후 6시경 저녁을 준다.

두 컵.

녀석은 순식간에 흡입한다.

얌냠 쩝쩝 먹는 게 아니라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는 느낌이다.

7시에 산책을 나간다.

공원을 돌 때도 있고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 때도 있다.

응가도 하고 쉬도 한다.


꽃개의 표정이 밝은 건 행복해서가 아니라, 공 때문이다.


우리 거 아니다. 녀석의 도덕심은 제로에 가까워 남의 집 공도 막 물고 온다. 곤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날은 반려견 놀이터에 우리밖에 없었다. 이건 누군가 두고 간 공. 제사를 지내라, 아주.


웰시코기 풀 샷?


마지막 외출은 밤 11시에서 자정 사이에 한다.

신문 배달하는 아저씨가 자정 무렵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는 걸 알고, 그 시간대를 피하면서 11시경으로 당겨졌다.

이 시간은 내 담당인데 자는 놈을 깨워서 나가는 거라 대개의 경우 쉬만 하고 들어온다.

다른 개들은 모르겠는데 꽃개는 밤이 되면 사람처럼 잔다.

토요일에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느라 늦게 자는 날에는 꽃개가 먼저 안방에 들어가 자기도 한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이


나 먼저 자러 간다.

고 하는 것 같다.

케이지에 들어가 자기도 하고, 케이지 옆에 방석 대용으로 둔 배게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기도 하고, 내가 자는 침대 옆에 와서 'ㄷ'자로 뻗어 자기도 한다.

정말 잘 잔다.

녀석에 비하면 아내하고 나는 불면증 환자 같다.


꽃개가 다른 개들한테 너무 사납게 구는 문제가 있어, 관심을 돌릴 목적으로 프리스비를 할 때가 있다.


새벽에 잠이 깨면 나는 악마의 유혹을 느낀다.

모른 척 자면 녀석도 모르지 않을까?

침대 밑을 보면 녀석이 나를 보고 있다.


끄응.

옷을 입고 비닐봉지를 챙긴다.

꽃개의 하루가 시작된다.



장소 협찬 ; 기흥레스피아 호수공원 반려견 놀이터.

카메라 ; 니콘 D5500.

렌즈 ; 니콘 35mm f/1.8G 번들 렌즈.

모델 ; 꽃개

인화 ; 일체의 후보정 없이 찍은 그대로 올림.

화이트 밸런스는 오토, 촬영 모드는 조리개 우선 모드, 조리개 값은 f/5, f/10 두 가지만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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