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는 잘못 없다.
사진을 찍고 돌아다니기엔 날씨가 너무 좋았다.
숙소로 돌아와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로비로 내려가 룸키를 맡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우리한테 돈을 뜯어내려 했던 백인 남성 직원이 '노'라고 답했다.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그는 DVD 빌리는 데를 가리키며 저기 어딘가에 숨겨놓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다.
차라리 백사장에 묻어둘까?
매트는 물론 수건을 들고 갈 수도 없었다.
누가 가져가면 곤란하니까.
분위기로 봐서는 안 그럴 것 같은데 여행자 물건을 슬쩍하는 잡범은 분명히 있다고 하니까.
룸키를 손에 쥐고 수영해야 하나?
다행히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수영복 바지에 지퍼 달린 주머니가 있었다.
지퍼가 옆선에 타이트하게 '숨겨져' 없는 줄 알았던 것이다.
오, 좋은데.
아쿠아슈즈를 신고 물안경을 쓴 뒤 포트 드루시에 입수했다.
레시가드까지 착용해, 오리발을 제외한 모든 장비를 착용한 입수자는 나밖에 없었다.
백인들은 맨발에 레시가드도 안 입는다.
그런 걸 보면 백인들이 꽤 강하단 생각이 든다.
우리 동네에서 간혹 마주치게 되는 백인 외국인의 옷차림을 봐도 (아웃도어가 뭐니) 한겨울에 헐렁한 셔츠 하나만 입고 돌아다닐 때가 있다.
우리는 문명의 이기에 과잉보호 받으려는 경향이 있는 걸까.
하지만 발바닥이 아픈 건 사실이잖아?
바다로 곧장 들어가 수심을 확인했다.
파도는 잔잔했지만 몸을 휘감는 조류가 있었다.
가장 깊은 데까지 들어갔다 해변 쪽으로 헤엄쳐 나오길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해안선을 따라 횡으로 가보자 생각했다.
거무튀튀한 바위틈으로 오가는 생선을 볼 수도 있겠단 생각에.
이 얼마나 평화로운 바다인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느긋하게 유영하다 숨이 차서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발이 안 닿았다.
수경으로 봤을 때는 바닥이 얕아 닿을 줄 알았는데 굴절 현상에 의해 생각보다 깊었던 것이다.
워떠...
못처럼 세운 몸이 쑥 들어갔다.
당연히 서서 숨을 쉴 거라고 기대했던 몸은 당황해 기도를 틀어막았다.
바닷물이 유입되면 안 되니까.
물속에서 질식해 버둥거렸다.
곧 죽을 거라는 사이렌이 울리면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됐다.
감각이 극대화돼 매 순간이 촘촘히 기억됐다.
별로 깊지도 않은 물속에서 몸부림치던 내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바닥을 튕기고 올라가 잠깐 숨을 쉰 뒤 다시 가라앉았다.
바로 옆에 바위가 있었다.
바위와 바위가 만들어낸 함정이었지만, 동시에 바위가 희망이기도 했다.
1미터만 움직이면 돼.
아니, 50센티미터만 움직여도 될 거야.
기도가 막힌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팔을 저었다.
발 끝이 겨우 바위에 닿았다.
수면 위로 얼굴을 뽑아 기도를 활짝 열고 숨을 들이켰다.
내가 죽을 뻔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백인들은 해변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그들 시선 아래쪽에 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발 끝 하나를 바위에 겨우 걸친 채.
살짝 닿은 물길에 몸이 흔들려도 미끄러질까 쫄면서.
쪽팔려서 백인들을 볼 수도 없었다.
차라리 저들이 내 위기 상황을 몰랐으면 했다.
백사장하고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도 함정처럼 발이 안 닿는 깊은 데가 있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뒤 바다를 나왔다.
햇빛에 바싹 마른 모래바닥에 서서 바다를 봤다.
뻘쭘하게 서서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먼 데를 바라봤다.
사진도 안 되고, 수영도 안 되고, 모든 게 안 되는 날이군.
나는 알리이 타워 전용 수영장에 가 소금기를 뺀 뒤 숙소로 올라가 씻었다.
죽을 뻔한 경험을 말끔히 털어냈다.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인터넷을 하는데 아내와 아들이 돌아왔다.
아내가 알라 모아나 쇼핑센터에서 사 온 물건과 음식을 건넸다.
용돈을 쪼개 할머니 선물을 산 아들이 핸드폰으로 찍은 테슬라 사진을 보여줬다.
아주 마음에 드는 빨간색이었다.
아들 *핸드폰의 HDR 설정으로 찍은 사진인데 품질이 쩐다.
스트롬볼리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피자와 초밥을 허겁지겁 먹으며 포트 드루시에서 죽을 뻔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두 사람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잠시 쉰 뒤 알리이 타워 수영장에 갔다.
아내와 아들은 수영을 하고 나는 죽음에 발을 담갔을 정도로 수영을 즐긴 만큼 비치체어에 앉아 노트북을 했다.
오랜만의 작업이라 그런지 잘 안 됐다.
객실로 돌아와 씻은 뒤 아내와 나는 와이키키 도심 산책에 나섰다.
카메라도 챙겼다.
'도심'에서 무얼 찍게 될지 모르겠지만 '웅장한 자연'과는 질적으로 다른 장르라는 이해는 있었다.
주로 직선을 다루게 되겠지.
아들은 호텔 방에 혼자 있기로 했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든 소니 콘솔 박스로 하든 아들 나름의 시간 깨기 요령은 있었다.
야박해 보일지 모르지만 양육에 있어 *나는 스웨덴 방식을 선호했다.
스웨덴 방식은 이렇다.
학교에 가야 하는 아들이 늦잠을 잔다.
안 깨워.
학교에 지각하거나 결석하는 건 아들이 책임져야 할, 아들의 인생, 아들의 삶이므로.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자녀의 독립심을 강화해 나간다.
부모가 해줘야 하는 부분은 분명히 해주지만 아들이 해야 하는 영역까지 부모가 나서서 해주지 않는다.
낯선 여행지에 아들 혼자 두는 건 보호의 의무를 등한시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독립심을 강화해주는 측면도 있다.
욕심 같아선 '혼자' 돌아다녀 보라고 하고 싶었지만 괌에서 호되게 *당한 적이 있어, 참았다.
포트 드루시 비치 파크에는 군사 박물관이 있다.
사람을 더 잘 죽일 수 있도록 극대화된 사물의 기념.
100미터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하와이안 셔츠를 한 벌 사고 싶긴 했는데 가격이 장난 아니었다.
T 갤러리아는 면세 구역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갈 일이 없었다
벨앤로스는 좋아하는 시계 브랜드인데 역시 가격이 장난 아니다.
가격표가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넌 욕을 얼마나 잘 하니?
마음에 드는 사진.
와이키키 도심의 흔한 스타일.
애플 스토어 앞에 학생들이 줄을 잔뜩 서 있었다.
신제품이 발표돼 입장을 기다리는 건가?
애플 스토어와 관련 없는 줄이었다.
아저씨가, 쫄았잖니.
여행은 최면이다.
마취제처럼 일상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준다.
그래서 나랑은 참 안 맞는 상품.
*어떻게 기억이 그래요?
하와이의 영혼이 한 줄로 서 있다.
라이브 공연이 한창인 쇼핑몰에 들어가자, 난데없이 튀어나온 거대한 나무.
거리 전체가 '관광'으로 들떠 있다.
두 가지의 신분만 있다.
관광객과 그들을 위한 종업원들.
자본가는 없다.
그들은 '신'처럼 보이지 않는 데서 수익만 챙긴다.
장승같다.
와이키키 해변의 중심부에 도착했다는 징후.
오, 저건...
에버랜드 *매직트리.
와이키키 해변 입구에서 만난 이 나무는 진짜였다.
헬조선 매직트리의 새소리가 스피커로 재현되는 복제품이라면 이 나무 밑에서 들었던 새소리는 진짜였다.
진짜 시끄럽고 진짜 날카롭게 지저귀는 새소리는 경이롭다기보다 위협적이어서 가만있으면 새똥을 맞을 것 같았다.
아내가 스마트폰을 건네더니 인스타에 올릴 이국적인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보다 아내가 더 잘 찍었다.
으음.
심지어는 내 카메라보다 아내의 구닥다리 *스마트폰 사진이 더 이국적으로 보였다.
의문의 1패.
이러니 똑딱이는 사양 산업이 될 수밖에
멀리 크루즈 여객선이 떠 있다.
해가 떨어지는데도 나올 생각을 않는, 뽕을 뽑으려는 사람들.
해변에 앉아 해가 저무는 하루를 바라보는 사람들.
기념사진도 찍고
반으로 접힌 바다도 찍고
꽃개 냄새가 난다고 달려드는 개도 만나면서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시간을 봤다.
여기가 딱, 하와이의 절반이다.
갑자기 남은 시간이 무척 짧게 느껴졌다.
해변을 따라 쭉 걸어가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막혀있었다.
젊은 친구들은 다리를 한껏 벌려 건너갔지만 우리는 더 이상 젊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
*물었다 ; 이런 표현이 유창한 영어 실력을 구사한 듯한 오해를 낳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몇 개의 단어와 표정으로 내 뜻을 전했다.
*핸드폰 ; 갤럭시 A5 카메라 성능 확인은 여기.
*나 ; 아내는 동의하지 않는다.
*당한 ; 미국법에 13세 미만의 어린이는 혼자 있어선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는 모양이다. 저녁에 지친 몸을 이끌고 아내를 따라 2시간 이상 쇼핑센터를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알기에, 아들은 방에서 쉬라고 했다. 우리가 트롤리버스를 타고 간 사이 아들은 PIC 리조트에서 나와 길 건너 ABC 스토어에서 풍선껌을 사 왔다. 그 장면을 목격한 PIC 직원이 관계자에 신고하자, 매니저는 (내키지 않았지만) 미국법에 따라 우리 숙소로 출동, 방에서 혼자 잘 놀고 있는 아들을 데려가 자기 사무실에 뒀다. 우리는 그런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GPO를 뒤지고 돌아다니다 뒤늦게 매니저 사무실로 불려 갔다. 아들이 무서워서 울긴 했지만, 우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건 매니저가 아닌 아들이었다. 아들은 경비와 매니저, 관계자들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알아듣고' 있었다.
*잊게 ; 중단시킨다.
*기억이 ; 이승환의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노래 제목을 패러디했다.
*매직트리 ; 나는 이 가짜 나무가 생겼을 때 사진을 찍었었다. 그래서 옛날 사진을 다 뒤졌는데 없어졌다! 대신 한 동안 잊고 지낸 아이를 만났다.
흐흐, 귀염 터지는데.
이 아이가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
이런 사진들은 막 찍었을 당시보다 시간을 먹은 뒤 더 가치가 깊어지는 것 같다.
*스마트폰 ; 갤럭시 S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