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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성에 묶인 르네

르네와 그레타의 첫 만남

by 구시안


4. 마녀의 성, 르네와 그레타




밤이 되면 부헨발트 수용소의 공기는 더 무거워졌습니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지독한 가스의 냄새가 아니라, 그녀에게는 절망의 냄새가 흘렀지요. 수많은 허공에 흩어진 영혼들의 숨결은 하얀 눈이 되어 무겁게 내려앉아 소리 없는 서러움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부헨발트 수용소를 휘어 감고 있던 것은 내리는 하얀 눈 사이로 드리워진 절망의 그림자뿐이었습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별빛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손톱은 차가운 벽을 긁으며 자신을 세워 갔지요. 숨조차 얼어붙은 새벽, 시간은 흐르지 않고 벽에 걸린 그림자만 천천히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인간이 가진 절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제가 오랫동안 바라본 인간의 절망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절망은 폭풍처럼 오지 않는 것이었지요. 그것은 눈처럼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소리 없이, 그러나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손끝에서 떨어진 한 줄기 빛을 담아보지만, 그것마저 자신을 비추기가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이곳의 공기는 너무 차가워서 소리조차 부서져 버리고 있었지요. 르네의 밤은 그녀의 푸른 눈동자의 떨림으로 물들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르네는 그 절망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죠.



저는 세상에 물든 피의 향연들이 향기롭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르네를 만났던 시절만큼은 저 역시 피의 달콤함을 잊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신도 갖고 있는 본성일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피를 무서워하면서도 그 피를 바라보는 것은 좋아하니까요.



저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존재랍니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늘 당신 곁에서 숨을 쉬고 있으니까요. 르네와의 맺은 계약이 어쩌면, 저를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철로 위에 자리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저의 모든 것이 르네의 향기에 의해 사라져 버렸던 시절이었죠. 그랬습니다. 하지만 틀림없는 건, 르네가 제게는 소중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죠. 뜬눈으로 밤을 세운 르네의 귓가에는 어느새 종이 울리고 있었습니다.



"기상! 기상! 어서 일어나!"



아침이면 막사 앞에 쌓여가는 시체들은 늘어갔습니다. 굶주림과 추위를 이기지 못한 자들의 운명이었죠. 르네가 자리하고 있던 막사에서도 매일 아침이면 차가운 시체들의 행렬이 사람들 손에 들려 나와 문 앞에 버려졌습니다. 르네의 손은 연신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살이 없는 광대뼈 주변의 살집을 꼬집어 대고 있었죠. 그들에게 혈색 있어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르네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아침이면 그동안은 하지 않았던 선별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수용소의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면서 병이 들거나 혈색이 안 좋은 자들은 선별되어 처형되었기 때문이죠. 수용인원보다 수용할 공간이 부족해진 나치의 방법은 그러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광활한 수용소 광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벽이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내려다보니, 마치 출구를 알 수 없는 미로와도 같아 보였죠.



운명이 갈리는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몸은 어느 겨울날에 보았던 자작나무 숲에 메마름과 비슷해 보였답니다. 르네의 모습은 마치 드 넓은 숲속에 작은 나뭇가지처럼 보였습니다. 선별 작업에서 살아남은 르네는 만나서는 안 될 사람과 운명 같은 사람을 동시에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답니다. 라디오 부품 공장에서 선택받은 아이는 르네와 어느 이름 모를 작은 소녀 둘이었습니다. 병사에게 이끌려 선별 작은 마친 르네는 그 소녀와 광활한 수용소의 광장을 걷고 있었지요.



" 뒤 돌아보지 마. 그들을 바로 쳐다봐선 안돼. "

" 왜요?"

" 저기 쌓여 있는 시체들을 봐. 그럼 이유를 알게 될 거야."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소녀는 소리 없이 르네의 손을 잡을까를 망설이고 있었죠. 이내 두 손을 입가에 가져가 자신의 입과 코를 가릴 뿐이었습니다. 수용소는 언제나 새로운 사람들이 내리고 다시 어디론가 떠나거나, 사라져갔을 뿐이었죠. 어디서 그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새로운 사람들의 등장을 알렸습니다. 대부분이 유대인이었지요.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유대인들 대부분은 모두가 총살당했습니다. 도착한 그들은 병사들에 의해 선별되기 시작했습니다. 르네는 알고 있었죠. 대부분의 사람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를 말입니다. 어젯밤 도착했던 새로 온 무리 중, 여성 대부분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걸 알게 된 건, 마녀의 성을 향하고 있던 르네의 향기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 속에 이름 모를 사람들은 수없이 사라져 연기로 흩어져 가고 있었지요.



르네는 마녀의 선택받았죠. 그것이 축복일지 불행일지는 저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녀의 선택을 받은 또 한 명의 어린 소녀와 함께 르네는 말없이 병사를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마녀의 성을 향하고 있는 르네의 발걸음에는 고요한 무게가 실려 있었어요.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말라버린 육체와 거칠어진 피부는 아름답던 르네의 얼굴을 희미하게 흐리고 있었죠. 르네가 갖은 특이한 그녀만의 향기는 어느새 사라져 갔습니다. 수용소의 수많은 영혼과의 냄새와 비슷하게 흐려져 가고 있다는 걸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르네를 그 수많은 수용자 안에서 찾아내기가 이젠 쉽지 않아 졌으니까요. 두리번거리며 르네를 찾기가 일쑤였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었죠. 저는 단 한 번도 제가 선택한 영혼의 냄새를 놓친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녀 스스로가 수용소에 물들어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자신의 본성을 잠시 숨기려고 하는 듯 말이죠. 저는 걱정됐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르네에게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들은 매일 벌어지고 있었으니까요.



마녀가 사는 별장은 부헨발트 수용소 안에서 가장 기괴한 대비를 이루던 공간이었죠. 수만 명이 고통 속에 죽어가던 지옥의 옆에 그녀는 마치 귀족처럼 살아가고 있었으니까요. 별장은 수용소 정문에서 불과 삼백 미터정도 떨어진 고지대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지요. 수용소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죠. 그곳은 그 마녀에게 더 없는 명당자리였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지옥의 발코니라고 부르기도 했으니까요.



아침이면 마녀의 푸른 눈동자가 수용소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이었죠. 그녀는 매일 사람들의 영혼이 타올라 흩어지는 수용소의 소각장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우아하게 차를 마셨습니다. 그녀다운 행동이었죠. 독일식 목조 주택 스타일의 이층 구조와 지하실을 갖춘 그녀의 공간은 마치 사람들의 피로 물들여 만들어 놓은 듯한 적갈색의 지붕이 덮여 있었습니다.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지중해풍의 흰색 벽체는 역운 것이었죠. 그리고 그녀가 매일 아침 자리하여 수용소를 바라보는 넓은 테라스가 있었습니다.



르네가 마녀의 성에 들어서자, 보았던 건 잘 정돈된 장미밭과 돌로 만든 작은 분수대였습니다. 그리고 마녀의 말(馬)을 위한 마구간과 울타리가 있었죠. 이 집을 지었던 수용소 사람들의 말을 르네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마녀의 별장에 다녀왔었지. 유리창 장식을 하러 갔었어. 마녀의 목욕을 위한 온수시설을 설치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한스도 있었지. 중앙난방을 위해 여러 명의 기술자 선별해 그 언덕을 올랐던 기억이 나는군. 저 저택은 피의 저택이었어. 마녀는 내가 만든 장식이 마음에 든다며 살주는 거라고 했었지. 그날 살아 돌아온 건 나 혼자뿐이었어. 저기에 간다는 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이라네. "



그는 목공 기술자로 분류되어 오랫동안 부헨발트 이곳저곳을 손댔던 '얀'이라는 폴란드인 중년이었지요. 그도 얼마 못 가 광장에 목이 매달려 있게 되었지만 말이죠. 그들에게는 나이가 들어가는 병든 인간은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새로 밀려드는 유대인 중에 목공 기술자는 많았었으니까요.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것이었죠. 그들의 그들은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야기하던 것을 르네는 정확히 기억하며 마녀의 성을 들어서고 있었죠.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마녀가 사는 별장의 모든 것은 수용소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것이었답니다.



" 멈춰! "

" 새로운 메이드인가? 풋. 얼마 못 가겠군. 행운을 빌어."

" 저기로 들어가. 소리도 내지 말고 조용히 들어가."



르네를 저지하는 한 나치 병사의 손은 잠시 욕망을 부르는 것이었죠. 그녀의 가냘픈 몸을 훑어 내리는 그 손에는 남자의 욕망 냄새가 흐르고 있었죠. 저는 그 손을 자르고 싶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저에게도 질투의 향기가 났었으니까요. 저 역시 르네를 만지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곁을 지켜주고 싶지만, 여전히 저는 허공을 떠돌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일제 코흐는 그렇게 당당하게 서서 그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르네와 힘없는 소녀의 영혼을 잡아먹을 듯한 기운이었죠. 벽에 걸린 머리가 박제된 사슴의 놀란 큰 눈은 르네가 아닌, 그녀를 따라온 힘없는 영혼의 어린 소녀를 닮아 있었죠. 르네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녀의 푸른 눈은 마녀의 눈에 지긋이 닿아 있었죠. 이상하게 마녀 또한 자신을 바라보던 르네의 눈을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응접실의 벽에는 사냥해서 박제된 사슴의 머리와 가죽 장식품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 장식품이 사람의 피부로 만든 것이란 걸 애써 르네는 따라온 작은 영혼에는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요. 거실 중앙에는 소문으로만 듣던 인간의 피부로 덮은 갓이 램프 스탠드 위를 덮고 있었습니다. 문신한 사람의 피부를 오려 만든 가죽처럼 가공한 표피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르네 향해 손짓 하고 있었지요.



" 너. 이리와봐."

" 네."

" 너는 이 것들 중에 무엇이 제일 맘에드니?"



그녀가 만지작거리던 피부 조각들을 르네는 역겹게 느끼지 않기로 했습니다. 바라보는 르네는 여러 가지 피부 조각들에 새겨진 것 중 어느 것을 고를지 크고 푸르른 눈망울을 왔다 갔다하고 있었지요. 선택은 빨라야 했습니다. 마녀에게는 참을성이라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 전. 이게 맘에 들어요."

" 그렇지? 너 보는 눈이 있구나. 나 역시 이게 맘에 들었단다."

" 거기 너. 이리 와봐."

" 네....."



어린 소녀는 르네와는 다르게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죠. 그런 모습을 좋아할 리가 없는 마녀였습니다.



"넌?"

"네?...."

" 말을 못 알아먹은 거야? 옆에서 들었잖아! 넌 어떤 게 맘에 드냐고? "

" 저는..... 그러니까 저는....."



그때였죠. 마녀의 손에는 이미 두꺼운 유리로 만들어진 재떨이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녀가 어린 소녀의 머리를 후려쳤을 때 그 소녀의 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를 기억합니다. 그것은 마치 어느 날인가 제가 프로방스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장미꽃밭의 휘날림과 비슷해 보였죠. 오랜만에 흠뻑 취했던 피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아름답게 보였던 게 사실입니다. 저는 원래 그런 존재였으니까요. 당신은 아직 모를 겁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작은 소녀의 머리에서 뿜어져 나온 피는 응접실 여기저기로 번져갔습니다. 그녀가 아끼는 바닥에 깔려 있던 카펫까지 순식간에 번져 갔지요. 저는 그때 보았습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녀의 모습을요. 를 있는 힘껏 꽉 깨물고 있는 르네를 말입니다.



전 그녀가 용기 내어 그 마녀의 목에 무언가를 쑤셔 넣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르네는 여전히 응접실에 걸려있는 박제된 사슴의 머리만을 응시하고 있었을 뿐이었죠.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어 그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르네의 생각을 읽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죠.



저의 욕심이었을까요? 르네가 그녀를 그날 그 자리에서 죽였다면, 르네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르네는 두 손을 굳게 쥐고 버티고 서 있었을 뿐이었죠. 바닥에 쓰러져 숨이 사라져 가는 어린 소녀의 눈은 힘을 잃어갔습니다. 얼마 정도의 짧은 진동이 있었을 뿐, 모든 것이 멈춘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죠. 그 어린 소녀의 목덜미를 잡아 테라스로 향하는 마녀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돌리는 르네는 잠시 갈등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었죠. 지금 저 마녀를 죽인다면 어쩌면 많은 사람이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이었죠.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마녀의 행동은 예측불허였으니까요.



르네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잠시 놀라고 있었습니다. 메두사의 눈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르네의 몸은 서서히 굳어버렸죠. 모든 생각조차가 사라져 갔습니다. 그녀의 몸뿐만 아닌 푸른 두 눈동자까지 순식간에 굳어버린 건, 마녀가 그 어린 소녀를 테라스 밖으로 던져버린 후에 느껴지던 것이었으니까요. 잠시 둔탁한 소리가 났다는 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당신은 이해할 거라 생각합니다.



" 더러워. 음. 나의 아름다운 카펫이. 어. 나의 사랑스러운 소파가 망가졌잖아."

응접실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마녀는 르네에게 말했습니다.

" 뭐 해! 이 쓰레기 같은 년아! 빨리 치우지 않고, 저 더러운 피. 얼룩도 냄새도 깨끗하게 지워! 어서!"



르네는 굳었던 몸이 풀리며 잠시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눈을 돌리며 찾아낸 것은 욕실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이 피를 닦을 만한 무엇이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어린 소녀의 피가 스며있던 카펫은 수감자들이 만든 수공예라는 사실을 르네는 붉은 피를 연신 닦아내며 알게 되었죠. 그녀가 들어간 욕실에는 희귀한 비누 향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수용소에서 들고 왔을 의약품과 고급 화장품들도 많았지요.



그녀의 일과는 매일 아침 목욕 후 승마복을 입고 마당을 거니는 것이 일었습니다. 자택에서 정원을 관리하고 시설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죽어 나간 건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어김없이 마녀의 눈을 함부로 마주친 자의 머리에는 곤봉이 날들었죠. 그녀는 그런 년이었습니다. 이미 더 이상 말 안 해도 왜 그녀를 마녀라고 불렀는지 당신은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르네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하얗게 백지화되어 있었습니다. 오로지 이 피를 지우는 것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녀의 눈은 어느 때보다 커져 있었습니다. 그런 르네를 가만히 둘 마녀가 아니었습니다. 응접실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더러운 피를 외치며 지워야 할 곳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르네의 눈은 오로지 카펫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르네는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저는 잘 안되는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가려 애쓰고 있었지요.



" 르네! 정신 차려! 그러다간 죽는다고! 시선을 돌려 어서! 그녀의 손을 보란 말이야!"




통했던 것일까요.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마녀의 눈을 피한 채 그녀가 손짓한 여기저기를 깨끗하게 지워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테라스 앉아 담배를 피우며, 수용소를 바라보고 있을 때 르네는 여기저기 집안의 구조를 파악하려 하고 있었지요.



"뭐 해? 다 닦은 거야? 이렇게 굼떠서야. 어서 빨리 끝내지 못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르네는 욕실로 다시 돌가 붉게 물들어 버린 천에 스며든 소녀의 피를 흐르는 물에 씻어냈습니다. 냄새가 나면 안 됐지요. 지금 죽고 싶은 마음은 그녀에게 없었으니까요. 그녀는 향기로운 비누의 조각을 냈습니다. 피로 물든 하얀 걸레를 빨기 시작했습니다. 코끝으로 스며오는 피 냄새라는 것은 르네에게도 역한 것이었겠지요. 그것은 사람만이 아는 역함이지 저에게는 상관없는 일상적인 냄새인데도 말이죠.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코를 막아주고 싶었습니다.



집안에는 또 다른 시선 하나가 있었습니다. 역시 수감자일 테지만 어느 여성 수감자와는 다르게 그녀의 머리는 윤이 났으며 찰랑거리고 있었지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독일인이었습니다. 그레타라는 여성이었지요. 그녀의 미모는 실로 빛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질투가 많은 마녀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나, 그녀도 분명 노예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는 늘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만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레타의 눈에 비친 르네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애잔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의심했습니다. 저 독일 여자의 정체에 대해 말이죠. 그레타는 르네를 슬금슬금 쳐다보며 떨리는 손으로 요리하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틀림없는 수감자였습니다.



"밥아직 안된 거야? 오늘 왜 이렇게 다들 느려! 시간이 없다고! 빨리 나가야 한다고!"

"거의 다 되었어요. 금방 차릴게요."

"더러운 년."




피우던 담배를 끄며 마녀의 입에 나온 말은 더러운 년이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았지요. 그레타. 그녀는 독일 정치범의 아내였더군요. 제가 잠시 웃었던 건, 마녀의 남편이 그녀를 건드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녀가 마녀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은 건 오로지 뱃속에 들어있는 남편의 씨로 만들어진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마녀의 남편은 아이를 원했습니다. 남편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것은 이 수용소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우습게도 마녀 역시 그의 손에 잡혀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죠. 사람의 또 하나의 본성은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존재라는 사실이었으니까요. 마녀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라는 것은 참, 웃긴 것이었죠. 그레타의 남편은 아우슈비츠로 보내졌으니 이미 이 세상 사람은 아닐 것은 분명했습니다. 저 여인도 르네와 다르지 않게 가여운 여인이 되어가 있을 뿐이었죠.



" 음. 향기로워. 너 제법 재주가 좋구나. 아주 깔끔해졌어. 이제 너도 부엌으로 들어와 일을 거들어. "



르네가 들어선 식탁에는 아름답게 빛이 나는 은제 식기가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고기 요리. 포도주과 빵 그리고 케이크가 올라왔습니다. 바로 저 아래 수용소의 사람들은 썩은 순무 국 한 그릇으로 하루를 버티고 있었는데 말이죠. 르네는 군침이 도는 것을 삼켜 넘기고 있었습니다. 그녀도 사람이었죠. 르네가 먹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르네 역시 굶주림을 참기 힘든 어쩔 수 없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레타가 끓인 수프의 향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녀의 표정도 변화가 없다는 것이었지만, 그녀의 요리에는 향기로운 무언가가 잔뜩 들어가 있는 듯, 잠시 마녀의 입을 닫아 놓게 하는 힘이 있었지요. 마녀는 말없이 허겁지겁 식사를 즐겼습니다. 조용히 그릇을 씻고 있던 르네 옆으로 온 사람은 그레타였습니다.




" 배고프지....?"

" 네..."

"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있으면 그녀는 승마를 즐기러 갈 거니까... 조금만 참아."

" 네..."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 후, 소리 없이 정리를 시작한 르네와 그레타는 말없이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소리 없는 교향곡처럼 느껴지기도 했지요. 그 둘의 뒷모습은 어느 도시에서 보았던 자매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녀들도 역시 이 숨 막히는 전쟁 속에 죽었지만 말이죠. 저는 이 두 명의 여인은 죽지 말길 바라고 있었을 뿐이었죠.



" 나갔다 올 테니, 너. 침실을 깨끗하게 정리해 놔. 테이블에 올려둔 장식품들은 만지지 마. "

" 네...."




승마복으로 갈아입은 마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나가버렸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목덜미에 묶어 놓았던 것을 풀어 버린 것처럼, 그레타와 르네의 몸은 반쯤 중력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한참의 숨을 몰아쉰 뒤 편안해진 숨 사이로 그녀들의 이야기는 이어졌지요.



" 나는 그레타라고 해. 너는? "

" 저는 르네예요. "

" 어차피 식료품도 관리를 하니, 저 여자가 남긴 것들만 먹을 수 있어. 먹을래?"



대답도 하지 않고 르네의 손은 이미 음식으로 가 있었습니다. 르네의 모습은 굶주린 산 짐승 같은 모습이었죠. 그런 모습을 애잔하게 바라보는 그레타의 손이 어느새 르네의 등 쪽을 향해 쓸어내려 주고 있었지요. 제가 르네에게 해주고 싶던 것을 그레타는 그렇게 해주고 있었지요. 하지만 여전히 르네의 몸에 손을 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배고팠구나. 천천히 먹어. 걸리지만 않는다면 몇 개의 빵 정도는 올 때마다 챙겨줄 수 있을 거야. "



여전히 르네의 시선은 음식들 향해 있었습니다. 손으로 먹어 치우는 음식들이 여기저기 흩어졌지만, 그것은 르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죠. 단지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습니다.



" 배부르니? "

"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어떡하죠? 제가 다 먹어버렸어요."



르네의 눈이 은식기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식탁의 음식들은 마치 애벌 설거지라도 한 듯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르네는 그런 자신이 싫어지기도 했습니다.



" 괜찮아. 나는 점심도 있고, 저녁도 있으니까. 너는 하루 종일 여기서 일하기로 한 거야?"

" 모르겠어요.... 어떻게 된 건지..... 저도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요."

" 아니야. 르네. 그런 소리하지 마. 내가 그녀에 대한 정보를 좀 줄 테니, 그 선을 잘 지켜준다면 너에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르네와 그레타도 왜 그녀가 마녀 이상이었지를 간과하고 있었을 뿐이었죠. 그녀들에게 불어올 절망의 바람은 이미 예견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느낄 수 있었죠. 돌이켜보면 사람에게는 늘 답은 없었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의 운명은 한심한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 속에 생명 중 가장 슬픈 존재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모든 것이 빠르게 그녀들의 운명을 바꾸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죠. 그거 아시나요? 인간의 삶에서 가장 재밌는 건 정해진 대본이 없다는 사실이죠. 그것은 제가 있는 세계에서도 변함없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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