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탈출을 꿈꾸다
그거 아시나요. 당신의 먼 조상들은 제한된 자원을 확보하고,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일정 수준의 공격성이 필요했답니다. 먹이와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혹은 짝짓기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마치 이런 본능적인 공격성은 이상하게도 사람이나 들판에 짐승이나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지요.
당신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편도체라는 것은 위협을 감지하는 경보음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공포와 분노와 같은 강한 감정을 즉각 활성화시키고, 논리적 판단을 담당하는 전전두엽보다 그 반응이 훨씬 빠른 것이랍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전전두엽이라는 것입니다. 전전두엽은 인간 마음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은 당신이 살아가는지를 결정짓는 핵심의 영역이죠. 그것은 뇌 앞부분. 당신의 이마 바로 뒤에 자리하고 있답니다. 지금 당신의 이마에 손을 한번 대보세요. 바로 그 뒤에 당신의 모든 것이 자리하고 있으니까요.
백오십 그램 남짓의 무게 안에 당신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지요. 그 무게는 들쥐와 비슷한 것입니다. 사실 이곳은 감정이 폭발하지 않고 표현이 되게 만드는 곳이지요. 인간이 가장 많이 스스로에게 잘하는 질문들이 있지요? 그 질문들을 당신은 아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게 옳은가?"
"어떤 선택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당신의 그곳은 미래를 계산하려 하는 곳입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계산하는 어리석은 기관일 뿐이죠. 어느 순간 사소한 일에도 화가 치솟고 통제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타인의 감정을 세밀하게 읽지도 못하면서 잔혹성이 올라가는 이유도 당신이 가진 전전두엽이 하는 일이지요. 현실 판단력 저하는 또 어떻고요. 당신의 우울과 불안을 증가시키는 곳도 바로 당신의 이마 뒤에 있는 그것이지요. 이 기관은 생각하면 할수록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그려냅니다.
당신의 머리에는 굉장한 것들이 들어있다는 것을 잘 모를 겁니다. 이 완벽한 시스템을 우리가 만들어 준 것이니까요. 여기서 우리란 저뿐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존재는 늘 사람과 함께 살아왔으니까요. 저는 사람의 진화를 지켜본 자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신비로운 일이 되고 있죠. 사람은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으니까요. 그 대단한 존재.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우리가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겁니다.
인간의 몸 안에는 오래된 동굴이 있습니다. 당신이 말하지 못한 문장들이 흩어진 채 눅눅하게 마른, 그곳에서 공격성과 방어 본능은 마치 한 덩어리의 그림자처럼 서로 붙어 떨고 있지요. 누군가는 분노를 발끝까지 몰아붙여 세상을 향해 발을 구르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움츠러든 어깨 속으로 자신의 심장을 숨겨 놓지요. 르네는 마녀를 향한 공격성을, 그레타는 자신의 운명을 지키기 위한 방어본능이 물들고 있었던 부헨발트에도 긴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 그레타.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요. 어떻게든 도망칠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
" 쉿! 미쳤어!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르네.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죽고 싶어서 그래? "
" 전 어차피 예전에 죽었어요.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요? 이곳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과 다를 거 없어요. 저는 어차피 죽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상관없어요. 저는 당신과 아이를 살리기로 했어요."
" 어차피 정해진 일이야. 상관없잖아. 이 아이도 언제 나올지 모른다고.... 바로 내일이 될 수도 있어. 나 같은 건 버려. 르네. 나는 독일인이야. 너와 함께 할 수 없어. 설령 이 상황이 끝난데도 우린 함께하기 힘들 거야. 너도 알잖아. "
"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우리 잘 생각해 봐요. 당신은 이곳에서 나보다 더 오래 있었고... 분명.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예요."
"르네. 아직도 모르겠어. 설령 너와 내가 도망친다 해도 끝나는 문제가 아니야. 너와 나만 죽으면 상관없지만, 우리로 인해 죽어나갈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니? 지금 나눈 이야기는 없었던 거야. 난 아무것도 못 들은 걸로 하겠어."
그레타의 보호본능은 그러했습니다. 자신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고 믿고 있었죠. 그녀도 르네가 자신이 생각했던 존재보다 더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을 겁니다. 마녀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말을 타고 수용소로 나가는 것을 테라스에서 확인한 르네는 그레타에게 허겁지겁 달려가 갇혀만 있던 자신의 생각을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르네의 머릿속에는 공격성이 불타오르고 있었죠. 오랫동안 억압받은 자존심의 하잖은 기지개 같은 거였죠. 제가 생각해도 그레타의 말처럼 부질없는 생각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확률의 문제였죠. 그레타의 말이 백번 맞았죠. 그녀들이 도망에 성공해도 그 본보기가 될 것은 다름 아닌 수용소의 남아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몫이 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미 마녀의 권력은 부헨발트에서 사령관의 아내라는 공식적인 지위를 초월한 것이었죠. 그녀는 부헨발트의 상징이었습니다. 나치병사들도 인정하는 권위 있는 인물이 되어 갔지요. 그것은 자신의 체제를 반영하는 하나의 완벽한 모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또 하나의 히틀러처럼 자신을 만들어 갔으니까요.
유대인을 향해 형벌을 가할 자가 이미 되어 있던 것이지요. 마치 신처럼 말이죠. 처벌이나 처형을 마음대로 명령할 수 있게 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심지어 인체실험을 위한 수감자 선별이나 청치범들의 처벌에 관여한 지도 말이죠.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의 그늘아래서 부헨발트의 시스템을 관찰만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녀는 시스템 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된 것이었죠. 그런 그녀를 자극해서 좋을 것은 없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나치였습니다. 부헨발트에 그녀의 잔혹행위를 바라보는 수용소안에 나치 병사들 또한 그녀를 보고 배워갔으니까요. 부헨발트 수용소에는 여전히 붉은 피가 물들고 있었습니다.
마녀는 매일 하는 산책길에 유대인을 무참히 죽여갔습니다.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녀의 기분에 따라 행동은 매일 달라지는 것이었으니까요. 다시 생각해봐도 그녀는 참으로 기괴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그렇게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유대인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오늘도 집을 나서자마자 자신을 쳐다 봤다는 이유로 정치범으로 수용됐던 자신과 같은 독일 여성을 맹견들이 침을 흘리며 짖어대고 있는 우리 안에 던져주었습니다. 그녀의 비명이 아직도 기억나는군요. 그녀에게 그것은 매일 행해야만 하는 습관 같은 것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죠. 르네와 그레타가 사라진다면 마녀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것이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상상만 해도 지금보다 더 끔찍한 서막의 시작이 될 것이었죠.
르네의 공격성은 마녀가 아닌,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그레타를 향하고, 그녀의 방어본능은 르네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잠시 생각해 봅니다. 그때 르네의 공격성이 불타오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를 말이죠. 참 재밌는 건, 이 둘의 결말이 당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었다는 것만 말해두지요. 그러나 그 둘은 결국 같은 자리였으며, 같은 상처에서 길어 올린 물 같은 것일 뿐이었습니다.
공격성은 사실 폭발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의 미세한 균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르네는 몰랐습니다. 그레타의 보호본능에도 균열이 있었다는 점을 말이죠. 손끝 하나 떨리지 않지만 이미 마음속에서는 오래된 짐승이 깨어나 부서진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었지요. 르네의 향기에선 아주 오래된 짐승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으니까요. 하지만 서둘러야 했습니다. 마녀의 남편. 카를의 부정부패 여행은 끝이 나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군사물자들을 빼돌리고 이익을 챙겼습니다. 그의 피는 부패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향기에서 그것밖에 느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여정에 올라 모든 것을 자신의 손에 쥐게 된 카를 오토 코흐의 입에는 굵은 시가가 물려 있었고, 그 연기 사이로 비치는 그의 입가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고 있었습니다. 자리를 한동안 비웠던 마녀의 남편이 부헨발트를 향해 돌아오고 있었지요. 유대인과 정치범을 특히나 싫어했던 마녀의 남편이 돌아온다면 부헨발트의 피냄새는 바이마르전역에 진동할 것이었습니다. 마녀의 별장에는 르네와 그레타만 자라히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독일 청년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뀌어 버렸죠.
인간에게는 또 한 가지 재밌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제가 르네를 통해 배운 사랑이라는 것은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마녀의 별장에는 사랑에 빠진 청년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레타를 흠모하고 있던 하인리히라는 이름의 청년이 그러했죠. 스물세 살의 남성의 향기는 참으로 강한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부헨발트에 자리하면서부터 시작된 향기더군요. 그 향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진해져만 갔습니다. 마녀의 남편이 별장 지하에서 그녀를 탐하고 난 후 찢긴 옷을 여미어 주던 것이 바로 하인리히였습니다.
그의 눈빛은 달랐죠. 탐하려는 눈빛이 아닌 그녀를 보호하려는 눈빛이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같은 독일인었기에 그런 동화 같은 장면이 나왔던 것일까요. 저는 궁금했습니다. 하인리히의 향기에는 충분히 흥분할만한 모든 것이 스며있었는데도 말이죠. 저는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봐야만 했지요. 언제부터 그레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말이죠. 그 사랑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보호라는 것이 되었는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그에게 보호본능을 일으키고 있던 상대. 그레타가 부헨발트에 수감되고 그녀의 남편이 정치범으로 아우슈비츠로 보내지는 열차에 올랐을 때부터였더군요. 작은 감방에서 남편을 보지 못하고 울고 있던 그레타를 처음 봤을 때부터 하인리히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 후 마녀가 선택한 첫 번째 메이드가 바로 그레타였지요. 저는 지금도 그레타가 만약 마녀의 선택을 받지 않고, 르네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달라 졌을까를 생각하곤 합니다.
하인리히도 마치 운명처럼 그레타를 따라 별장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었지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그의 그레타를 향한 애정은 사랑이 되어 갔습니다. 그것은 마치 깨질 듯 만지기도 어려운 존재처럼 되어 갔지요. 마녀의 사상체제는 완벽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수많은 학대와 고문을 받았습니다. 마녀의 손에 그녀는 쉽게 깨지는 도자기 인형 같은 것이었죠. 마녀가 그레타를 선택했던 이유는 유대인 따위를 자신의 집에 들이기 싫어서였습니다. 이왕이면 노예도 같은 혈통을 고른 것이었지요. 마녀는 그랬습니다. 더럽다고 생각한 유대인에게 매일 침을 뱉기 일쑤였으니까요. 정치범의 아내였던 그레타도 똑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마녀의 체제의 그녀는 반역자에 불과한 것이었으니까요. 하인리히가 르네와 그레타와 함께 할 줄은 저 역시 몰랐습니다. 저는 르네의 공격성과 그레타의 보호본능 사이의 틈에 있었던 하인리히도 가련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저는 그레타를 이해합니다.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말이죠.
자신을 지키려고 몸을 웅크렸던 시간을 기억하는 존재, 어쩌면 먼 조상들의 밤을 통과해 이곳까지 도달한 흔적. 그리고 그녀의 방어 본능은 가끔은 눈 속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가끔은 손등 위로 떨어진 이슬처럼 사라져 아무도 그것을 본 적 없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레타도 한 때는 위협 앞에서 뒤돌아서는 순간조차도 허공을 향해 조용히 주먹을 쥐고 있던 날이 많았습니다.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먼저 살아남고, 싸우지 않으려는 마음과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감각이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며, 어두운 내면의 방 안에서 그런 자신과 멀찍이 마주 앉아 있는 날이 많았던 그레타였습니다. 그 둘이 의논한 결론을 마치 자신의 의지인 것처럼 받아 들이고, 하루의 경계를 넘는 날은 그렇게 이어져 갔었으니까요.
인간의 공격성과 방어는 결국 몸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언어였다는 걸 당신은 알지 못할 겁니다. 당신은 그녀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피부 아래서 잔잔히 타오르며,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는 작은 불씨. 그 불을 두 손에 움켜쥔 채 타지 않으려고 애쓰고, 그러다 문득 스스로를 태우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 그레타가 당해 온 것은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상처들이었습니다. 상처는 발화점이자, 또 하나의 숨결이라는 것을 그녀는 자신의 보호본능에 각인하고 또 확인하고를 반복하며, 그렇게 자신을 지켜왔을 뿐이었으니까요.
" 르네. 설마 계속해서 도망칠 생각을 한다면 앞으로 너와는 말하지 않겠어."
" 그레타?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당신은 저와 함께 이곳에서 나가게 될 거예요. 저는 계속 그 생각을 이어갈 거고, 제 손에는 당신 손이 잡혀 있을 테니까요. 제발 그때가 되면 제 손을 놓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레타는 대답 없이 허리에 한 손을 올리고 난 후, 뒤돌아 서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이상하게도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가 확인하려 했지만 르네의 머릿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향기에서만 느껴지는 것은 보호라는 단어뿐이었습니다. 잠시 후 그녀는 또 다른 손을 곧 태어날 아기가 들어있는 더욱 무거워진 배를 받쳐 들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문을 잠겄습니다.
르네는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면서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이 부헨발트에서 탈출하겠다는 다짐이었죠. 그 다짐의 동행엔 분명 그레타가 함께해 줄 거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녀도 몰랐겠죠. 그레타의 보호본능의 균열에서 무엇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는지를 모르고 말이죠. 그것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르네는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전전두엽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습니다. 자신에게 물어봤어야 했습니다. "이게 옳은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스스로에게 질문했어야 하는 그것을 했어야 했습니다. 제가 만들어 놓은 그 시스템을 이용했어야 했습니다. 이 질문들을 스스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르네가 받게 될 그 형벌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인지 르네는 아직 모르고 있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