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다 그러나 고맙다
가장 따뜻한 온도의 차를 우려내는 동안, 나는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창을 열어 차가운 공기를 느낀다. 찬 공기가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많은 생각들로 가득해 쉼 없이 흘러간다. 12월의 달력이 나타났다. 올해도 마지막의 달이라는 사실이 놀랍지도 않을 만큼 시간은 이미 제 속도가 아닌 다른 것을 보태서 내고 있는 듯 하다.
미련하게도 이미 흘러가 버린 세월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마지막 달력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는 다른 생각들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바쁘게 산다는 것은 결국 거창한 일이 아니었다. 그냥 흘러가는 것. 말없이 소리없이 그냥 흘러가는 것일 뿐이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며, ‘언젠가 해봐야지’ 했던 것들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일상들. 그 모든 것이 바쁨의 다른 말이었다.
그냥 사는 것이 바쁜 것이다. 하루가 흘러가고, 어느새 한 해의 끝인 12월이 되었다. 마지막 달력의 숫자. 또 다시 돌아온 이 숫자에 대한 감흥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사람은 마지막 장을 넘길 때에서야 비로소 현재를 묻는다. 마지막 달력을 바라보며 우리는 갑자기 멈춰 선다. 지나온 날보다 남은 날이 더 적어 보이고, 앞으로보다 뒤쪽이 더 두꺼운 페이지가 되어버린 순간, 우리는 묻게 된다. “지금 나는 어디쯤인가.” 사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현재’가 아닌 ‘다음’에 기대며 산다.
다음 달, 다음 주, 다음 일정, 다음 목표.그러다 마지막 장을 마주한 순간. 미뤄두었던 많은 질문들이 한꺼번에 돌아오는 시기. 마지막 달력은 그래서 묘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묵직한 질문을 건넨다. “너는 올해 단 한 번이라도 너 자신을 이해한 적이 있었나.” 현재를 묻는다는 것은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뀐 ‘나’를 확인하는 일이다. 애써 모른 척해왔던 마음, 감정에 쌓인 먼지, 해야 했으나 하지 못한 일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도 기어이 버티며 살아온 나 자신. 사람의 심리는 늘 마지막 순간에 밝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아 있는 시간이 적을수록 무던하게 흘러가렸던 수많은 현재는 유난히 선명해진다. 마치 흐릿하던 사진의 초점이 마지막 장에서 맞춰지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달력을 보며 현재를 묻는다. 이는 후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다시 한번 붙잡아 보려는 본능 같은 마음 때문이다. 나는 또 한번 해의 마지막에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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