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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 사는 백조와 박쥐

신발끈에 매달린 두 생명으로부터 시작된 사유

by 구시안


베를린의 거리를 걷다 보면 도시는 늘 무언가를 보여주기보다는, 그저 조용히 지나가게 한다.

아스팔트에 덧칠된 시간, 바람에 밀린 먼지, 사람들이 잠시 멈춰놓고 떠난 발자국들. 그 위를 나는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 그저 한 발짝씩 내딛으며 지나간다.



지난 밤 숙취로 어지러운 상태에서 일어나 호텔방을 서성이다가 세상으로 나온 발.

담배 한대를 피는데 유난히 발끝이 시선을 끌었다. 신발끈이 느슨하게 풀려 왼발엔 백조를, 오른발엔 박쥐를 달아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신발을 고쳐맸다. 지난 지인들과 식사와 술을 하며 운동화로 떨어져 물들은 하얀 신발끈 한쪽을 풀러내고, 다른 신발에 매져 있던 검정색의 신발 끈으로 대체하고 있던 술취한 깊은 밤의 비틀버리 며 끈을 끼우고 있던 내가 생각났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마치 백조와 박쥐가 발끝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신발끈이 유려하게 곡선을 그리며 마치 호수 위에서 고개를 든 백조처럼 보였고, 검은 끈은 어둠 속에서 접힌 날개를 조용히 숨기는 박쥐의 실루엣처럼 느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도시는 늘 우리 발 아래서 조용한 은유를 만든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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