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밤의 언어 17화

꼬까 검정고무신

추억의 언어

by 구시안

검정고무신은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현관문 옆, 신발장 아래, 어린아이의 자존심에 숨겨진 아무도 일부러 보지 않는 구석. 비 오는 날이면 물이 먼저 고이고, 겨울이면 찬 기운이 가장 오래 남는 자리였다. 그 검정고무신은 작은 호수처럼 얼어붙어있는 날이 많았다.



검정고무신은 늘 낮은 곳에 있었다. 신발장 가장 아래, 먼지가 먼저 쌓이고 빛이 늦게 도착하는 자리. 아무도 일부러 꺼내지 않는 그곳에서 신발은 하루의 무게를 말없이 받아냈다. 그 신발을 신고 처음 혼자 학교에 가던 날을 기억한다. 가방보다 먼저 신발을 신었고, 신발보다 먼저 마음이 바짝 긴장했다. 골목길의 자갈 하나, 맨홀 뚜껑의 차가운 온도, 웅덩이를 피하지 못해 스며들던 물기까지 검정고무신은 모두 숨기지 않고 전해주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단단했고, 나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검정고무신은 넘어지는 법을 먼저 가르쳐주었다.

맨발로 신으면 땀으로 발의 피부가 고무와 닿아 미끄덩 거렸다. 무릎이 까지는 감각, 피보다 먼저 올라오는 뜨거움, 울음을 삼키는 데 걸리는 짧은 시간. 신발은 말이 없었지만, 아이의 하루를 통과하는 데 필요한 정보는 늘 정확하게 제공했다.



신발은 그 자리를 선택한 적이 없었다. 그저 거기에 놓였고, 거기에 남았다. 어릴 때 나는 그 신발을 부끄러워했다. 이왕이면 꽃이 그려져 있는 화려 한 신발을 원했지만 사주지 않았다. 그저 검정이라는 색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이 싫었다. 오래 신으려면 검은색이 최고라며 내 작은 발에 고무신을 신겨주던 아버지의 손이 싫었다.



동무들이 비웃었다. 고무신을 신고 왔다고. 처음은 그래도 봐줄 만한 것이 쉽게 변해갔다. 고무는 쉽게 닳았고, 바닥은 얇아져 발바닥의 온도와 거리의 감촉을 그대로 전했다. 걸을 때마다 땅의 상태를 숨기지 않고 알려주는 신발은, 아이에게는 지나치게 솔직했다. 비 오는 날, 집 앞을 지나던 물소리를 기억한다. 빗물이 골목을 따라 흘러내리고, 검정고무신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던 감각. 양말이 젖는 게 싫어 발을 조금씩 비틀어 걸으며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던 아이. 그날의 나는 이미 참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종종 그 검정고무신을 떠올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장 많이 버텨준 것들에 대해 생각할 때, 늘 검정고무신이 먼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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