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자기만족 06화

Vogue

잡지로 시작되던 나의 열정

by 구시안

내가 이 잡지를 발견했을 때, 나이는 열일곱이었다.

잃어버린 『수학의 정석』을 사러 가는 길.

청계천의 작은 서점, 패션 잡지들이 가지런히 놓인 곳에서 만난


Vogue.


그 단어가 나를 사로잡았다.


이 잡지는 세계 여러 도시에서 판매되고 있었고, 그것을 보는 수많은 소녀와 소년들은 꿈을 꾸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지금도 이 잡지는 누군가의 미래를 점지해주고 있을 것이다.


운명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


그렇게 우연히 시작했던 모델 일은 어렵지 않았다. 여름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러 압구정에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다니던 시절, 뉴웨이브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의 눈에 띄어 시작하게 된 일이었다.


패션 디자이너가 만들어내는 옷이라는 창작물은 나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 몸에 입혀지는 것이 즐거웠고,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 꿈을 꾸었다. IMF 여파가 남아 있던 시절,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고, 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었지만,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굳히게 해준 것은 바로 Vogue에 실린 예술적인 감각들이었다. 에디터의 글과 사진 속 미장센이 나의 꿈을 키워주고 위안이 되던 시절이었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은 이해하겠지만, 부모님의 직업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었다. 전공도 그렇고, 반드시 그 뒤를 따라야만 하는 묵언의 약속이라도 맺어진 것처럼, 나의 취향과는 다른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했다. 부모님의 의사가 가장 많이 반영되는 시기였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패션이 아닌 건축을 전공하게 되었다.


2년 6개월, 지독하게도 행복했던 군대 시절을 보내고, 복학의 기운과 함께 봄이 찾아왔을 때 나는 집을 나왔다. 혼자 살고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 모아 둔 돈이 제법 있었고, 모든 형식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것을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아무도 나를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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