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에 머무는 밤

보고, 걷고, 생각이 흘러가도록 두는 것

by 구시안

옛날 무언극에나 나올 법한 차림새였다.
머리에는 기하학적인 요소가 가미된 독특한 모자를 쓰고, 한 아시아인 남자가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 보였다. 뾰족한 턱수염은 유난히 날카로워 보였고, 나는 본능적으로 약간 거리를 두고 그를 바라보며 걸었다. 디자이너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보다는 개성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인상이 먼저 들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 듯했고, 영어는 놀라울 만큼 유창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만약 이 낯선 개성이 직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이 도시에서는 다소 이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굳이 말을 건네지는 않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그런 시선을 즐기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동대문운동장.
그러니까 내가 장미라는 담배를 물고 롤러를 타던 그곳에 생긴 DDP.

나는 쉬는 날이면 종로의 큰 책방에 들렀다가 서촌을 돌고, 이곳에 오곤 한다. 중앙에서 커피 하나를 사 손에 쥐고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서울 안에 많아졌다는 것은 이제는 흔한 일이지만, 극단적인 애국심은 없어도 문화적인 여파로 한국을 찾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어느 작은 축구장에 모여 추운 날에도 땀을 흘리며 뛰는, 볼이 빨간 소년들을 보다 보니 난롯불을 피우던 교실이 떠올랐다.


난로 위에 올려둔 도시락.
노란 주전자.
고구마.

미군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둔 덕에
어느 동무는 팝콘을 가져오기도 했고,
전투식량을 나눠 먹던 시절.




겨울의 담쟁이덩굴이 오래된 회색 돌벽을 빼곡히 뒤덮고 있었다. 예전에 다니던 학교를 둘러보며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오히려 예전의 건물들이 더 안전하고 듬직해 보여, 세월이 지나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반가웠다. 도시는 여전히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고 있는데, 학창 시절을 보낸 이곳은 그대로라는 사실이 다행인지, 아니면 이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게는 불행인 일인지 잠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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