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Your Mark

Shadows at the Starting Line

by 구시안

구불구불해진 책을 다림질할 수도 없고,

손의 온기로 슥슥 펴보지만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무거운 것으로 올려놔야겠다 싶어,

구불해진 책 위에 빳빳한 책을 더해 올려 놓았다.


요새 관심 가는 망자를 손에 묶고 다니다시피 하다가 이제는 좋은 곳에 가라고 요단강을 건너게 했다. 아주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이 작가가 쓴 글은 공작의 살아 있는 깃털을 뽑아 잉크에 묻혀 쓴 것처럼. 지독하게 사실적이고 표현적이었다. 마치 실제로 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빠져들어 있었다.


무엇을 쓸까 하다가, 꽃에 대해 써볼까 고민하던 끝에, 정신병동처럼 모든 게 하얀 색으로 이루어져 있는 집 자체가 어둠의 색을 먹고 있었다. 암흑이 된 거실 한 켠에, 부두에 시신을 묻고 온 사람처럼 앉아 있는 그림자를 바라본다.


내 인생의 영적 본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헛되고 가치없는 몽상에 잠기는 나는.


오늘 밤.

성공한 사업가도 아니고,

의사,

판사,

선생님도 아니었다.


나는 200M

육상선수가 되어 있었다.


On Your Mark.

딱 거기까지만 자리한 육상선수.

그 정도가 좋겠다.


“Shadows at the Starting Line”

내일 할 게 많은데 오늘 밤도 이 지랄이다.




정오쯤 휴식 시간에 들어간 카페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곳에서 적당히 자유로워진다면 후회는 하지 않겠다는 예감이 들어 노트북을 켰다. 새로운 매장의 인테리어에 열을 올리고 있는 대표의 일그러지는 못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카페에서 맞닥뜨리기라도 한다면 별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1도 없는 곳을 찾아 왔기에 그 희박한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순한 고양이처럼 살 수가 없는 심장을 가진터라, 그에게는 유쾌한 부하가 되어줄 수 없는 피를 타고난 터라, 눈물없이 이별 할 그날까지는 이 정도의 거리감과 존재감을 두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비록 대표가 형편없어 보일지라도 그는 이미 나의 일부가 되었고, 일용한 양식을 주고 있으며, 헤어진다면 눈물을 흘리거나 죽을거 같은 심정은 아닐거 같기에, 나의 임무는 완벽하게 수행하려 노력할 뿐이다. 어떤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형태의 이름으로 대표라는 이름으로 까다롭게 굴 때조차, 이 세상 모든 추상적인 고용주들보다 훨씬 다루기 쉬운 그를 미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커피를 마시며 가끔씩 이름 짓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건강해 보이고 쾌활한 남자의 이름이 무엇이 좋을까 생각하며,
마치 운동장 트랙 위에 번호 순서대로 선 육상선수들의 이름을 적는 것처럼 하나씩 적어 보고 있었다.

울분과 불멸에 대한 갈망, 그리고 일종의 허영심까지 더해
그 모든 것을 이겨낸 육상선수들의 이름들을 지어보며 시간을 쪼개고 있었다.

이야기가 점점 구체화되자, 모두가 서로를 이기기 위해
트랙 위에서 반바지와 런닝셔츠 차림으로 가슴에는 번호표를 달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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