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자기만족 13화

이마 위의 도시

눈이 녹지 않은 아침에 시작된 하루의 기록

by 구시안

눈처럼 새하얗고 창백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알프스가 창가에 드리워져 있다면 좋겠지만, 서울이라는 도시는 아직 빛이 없는 어둡고 차가운 이마를 드리우고 있다. 앞집의 지붕이라는 이마에는 아직 녹지 않은 결정들의 눈이 작게 빛을 내고 있었다. 아침에 지각을 하기 시작한 태양도 일곱 시가 넘어야 그 모습을 볼까 말까 하게 되었다. 계절이라는 것에 따라 움직이는 것들도 참, 그 모습이 다양하다.


지난밤의 꿈이 사나워 중간에 일어나 물을 마시러 갈 때 흘렸던 것일까. 바닥에 흘린, 아직 증발하지 않은 물을 훔쳐내고 발바닥을 적신 물기까지 닦아냈다. 꿈속에서는 금발의 구불구불한 머리를 가진 자들과 전쟁 중이었다. 미술 시간에 그려 봤던 데생의 주인공쯤이라고나 할까, 그런 얼굴이었다. 그는 반쯤 이지러진 입으로 은색의 풀잎을 깨물고 있었다. 무기를 손에서 놓쳐버린 나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웠는데, 목덜미로 덤벼드는 금발의 조각상들이 그렇게 가까이 올 때쯤 꿈에서 깼다. 전쟁에 패배한 불명예스러운 전사라도 된 것처럼 축 늘어진 채, 침묵으로 가득 찬 거실로 향했던 것이다.


창을 열고 시야에 들어오는 도시를 잠시 바라본다. 예전과 다름없는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와 새롭게 올라가는 구조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아침의 도시는 영웅적인 위대한 승리를 예고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고달픈 노동으로 가득한 하루의 시작을 굳이 재촉하고 싶지는 않아,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앉아 잠시 멍을 때리다가, 글을 쓴다. 감각 안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그 무엇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그저 지난밤 꿈은 개꿈이라고 확정 지으며 이것이 현실이라고 인정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우연이 아닌 삶을 살고 있는 사람도 있을까.

나는 필연을 가장한 우연이 제일 싫다.


글을 쓰는 이유가 유일한 탈출구였는지도 모른다. 우연한 존재가 되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쓴다. 그것 역시 하나의 행위이고, 사실이기 때문에, 속에 있던 말들이 밖으로 밀려 나오는 순간, 확인하게 되는 것이 있다.


생각보다 단단하게

나에게 쥐어지는 무엇.

아직 이름을 정확히 모르는 감정들이
궁금해진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잠시 따라 부른다.
감정들은 변이를 거듭하며
점점 섬세해지고,
우아한 고요의 방식으로
모습을 바꾼다.


탁자 위에 놓인 반쯤 접힌 거울을 펴 보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티가 난다.

얼굴에 장난감 로봇처럼 플라스틱 막을 씌울 수는 없어도

오늘은 표정 관리가 조금 필요한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




미지근하고 틀에 박힌 관계. 애초부터 뜨거웠던 적이 없는 관계 속으로 들어갈 시간이 다가온다. 새치가 나올 법 한데 아직 춥다고 안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봄을 기다려 보기로 하며 칫솔을 물었다. 아침부터 두툼한 스테이크를 준비해 줄 사람은 없지만, 나에게는 전자렌즈가 있으니까. 가장 간편하게 간편식으로 나온 미역국 하나를 뜯어 데운다. 현미와 하얀 쌀이 교묘하게 섞여 지어진 밥에 작은누나가 이고 지고 온 김치를 올려 먹고 하루를 보낼 에너지를 넣어주었다. 그 맛이 만족스러워 잠시 배를 문대다가, 옷을 입는다.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고요하게, 매일 아침이면 숨바꼭질 중인 핸드폰을 여기저기 찾다가 그것을 손에 쥐고 나선다. 발걸음은 날씨에 맞춰 자연스레 빨라져 역을 향하고,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 찬 지하철에 몸을 싣고 서울의 지하를 쑥쑥 빠져나갈 때면, 문득 이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 지금은 어떠냐고 "


나는 "팡파르 울리는 소리 하고 있네."라고 대답해 주고, 가방에서 책을 찾아 출입문 쪽에 기대에 이야기 속에 빠지기로 했다. 현실 속에서 현실을 이야기하는 책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 적은 글이나, 정보나, 사는 이야기를 접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아침이었다.


오늘만큼은 하늘에서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의 눈이 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애써 잠재운 그리움이 새어 나올까 두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하얀 것 위에 새겨진 발자국들이 군무처럼 지쳐 보이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하늘은 방긋 웃듯 자신의 한편을 세상에 내어주고, 겨울의 마른 가지 위에 햇빛이 앉았던 자리 그대로 기꺼이 그 빛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리 잡지 못한 가슴을 몸부림치며 깨어난 용산역 광장의 비둘기들은 그렇게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잿빛 하늘을 뚫고 잠시 스쳐 간 순백 위로, 그들의 지친 삶도 함께 쓰러지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사람들의 시선이 따뜻하길 바라는 듯, 비둘기들은 작은 부리로 깃털 사이사이를 매만지고 있었다. 서로의 몸을 부딪히며 만들어 낸 작은 온기들이 온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서울이라는 이마 위에 존재하고 있다.

아침은 그렇게 측은함을 이기지 못하는 색으로 바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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