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善)도 악(惡)도 아닌 존재
나의 도덕성은 간단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선(善)도
악(惡)도
행하지 않는 것이다.
나처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지 않을 권리가 있고
세상에는 이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악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저
한 배에 오른 신세들이다.
동시대를 살아가게 된
여행 동반자로
서로를 배려해야 한다.
친절이라는 것은 기분이 일으키는 변덕이다. 타인을 변덕의 희생자로 만들 필요도 없고, 선행은 누군가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 되기도 하기에, 다른 사람의 삶을 방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돕거나 뭔가를 밝혀 알려주는 것은 하지 않는다. 신비주의에 구토감마저 이는 혐오를 갖고 있고, 솔직한 편이며,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것도 동정하지 않는다. 살아가며 모든 종류의 진지함을 고수하는 진지한 이들과 어울릴 일도 없지만,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간섭하려 들거나, 진실을 발견하고 세상을 개혁이라도 하려 드는 사람들을 볼 때면 여전히 구토감은 거의 육체적인 증상이 되고는 한다.
내가 느끼는 그리움은 그저 문학적인 것에 불과하다. 누구나 그렇듯이 자신의 어린 시절은 어떤 외부적은 것으로 기억되고, 보여지는 외부적인 것들을 통해 기억되는 것처럼, 내가 기억하는 것은 오직 이곳에서 써 내려가는 글들에 담겨 있을 뿐이다. 나를 감동시키는 것과 내가 살았던 장소들의 추억, 그곳에 놓여있던 가구들의 모습, 그곳에서 행했던 얼굴과 몸짓들을 담아 마음속 금고에 넣어 놓으며 마치 누군가에게 감추고 싶은 금은보화처럼 과거의 순수하게 기록된 시각적 영상들을 여기에 자리해 문학적인 관심을 기울여 보는 밤이 깊어 갈 뿐이다.
깊은 밤이 물든 자정이 넘은 시간이 되면
나는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다는 사실과
내가 기억해서가 아니라
내 눈에 보이기 때문에
감동하고 기억하는 것이란 걸 알게 된다.
내가 그리워하는 건
장면들에 불과하다.
과거의 일들을 상기시키며
내게 말 걸어오는 방식이
냄새라는 것처럼
과거는 신기하게도
냄새를 통해 쉽사리 다가온다.
나를 무척 아껴줬던 사람들
귀 기울일 때 받는 느낌.
누구나 갖고 사는
과거의 소박한 것들이
단순한 사실들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도덕성을
생각해 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선과 악으로 구분한다면,
나는 둘 다도 아닌
형이상학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다.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고
보편적 감각의 추상적인
중심이 서 있는 이상한 사람.
넘어진 상태로
다양성을 비추는
자각(自覺)을 가진
세상에 수많은 거울 중 하나일 뿐이다.
가끔은
이런 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렸기에.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함께 행동하는 것이
병적인 충동이라고
느껴지고 있다.
개인의 영혼을 빌려주기도 하는
타인과 맺는 관계에 날이 서 있는 것도
공존이라는 악마적인 것에
항복하기 싫어서다.
나의 자의식만이 현실이라는 것을 안고 가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려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진 않는다. 어른이 되면 삶은 다른 이들에게 적선하는 행위로 속행 되기도 하기에. 서로가 갖고 있는 개별성을 공생(共生)이라는 난잡한 파티 속에서 낭비해 버리고 싶진 않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내뱉은 단어.
하나하나가 배반이라는 것이 되는 세상에서
조심스러워 입을 닫고 산지도 오래다.
그나마 참을 수 있는 소통의 매개가
나에게는 글이라는 것인데,
글은 영혼 사이에 걸쳐진
다리 위에 돌이 아니라
별 사이에 빛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둠을 좋아하지만
밝은 것을 가리키고 있는
나의 나침판은 너무나 정확하기에
더 신중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설명하는 자를 믿지도 않는다.
모든 철학은 영원의 외피를 두른
외교술에 불과하다.
실체는 없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완전히
순전히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명성을 누릴 생각도 없으며,
고결한 작가 따위는 될 생각도 없지만,
출판하지 않는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은
어디든 갇히지 않는다는 것 하나는
알고 있을 뿐이다.
쓰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니까.
내가 생각하는 작가란
자신의 본성에 따라 글을 쓰며
쓴 것을 혼자만 간직하는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다.
솔직히
만질 수 있는 본질로 만들어진 외부 세계일 뿐인데, 다른 사람들이 내 안에 있는 우주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사람들은 관심이 생각보다 타인에게 없다. 자신에게 있지.
낙담의 미학이 난무한 문학계라고는 하지만,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사회화하는 것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것은 출판업자이고, 생산하는 것은 인쇄업자이고, 글을 쓰는 것은 작가라는 이름이 붙여진 사람들의 몫이니 얼마나 저열한 구도인지 최소한의 일관성이 없다는 장점은 있는 곳이다.
사람은 의식이 분명해지는 연령이 됐을 때 사람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자기 이상의 형상과 이미지를 닮기 위해 심사숙고하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무력함과 단어 몇 개를 챙겨 두었기로 한다. 열정이란 생각보다 저급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표출한다고 진실하지 않으며, 착하지 않으며, 악하지도 않으며, 진실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하게 되어 있다.
사람은 언제 진실한지 사실 알 수가 없는 동물이다. 항상 감상만 있을 뿐.
황홀한 봄의 석양을 함께 바라보지만, 결코 그 풍경을 좋아만 하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서로가 느끼는 것이 다른 이유에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 어쩌면 자신에게 의견을 가진다는 자체가 스스로를 배반하는 짓이기도 하기에.
어쩌면 의견이 없다는 것이 존재하려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물드는 밤. 사람들은 이미 의견을 다 가진다는 것을 확인하는 글들을 읽어 내려가 보며 무르익어가는 이 밤에 내게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
어쩌면 그동안 스쳐간 사람들 모두가 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었으며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끼고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낯선 무대장면일 뿐, 그저 보고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닌 나일뿐이다.
가끔 어지러운 서랍 속에서 오래 전의 쓴 글들을 보게 되면,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의 글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그 글 안에 있는 나를 못 알아볼 때가 있는 것처럼. 혹은 어느 다른 생에서 쓴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다면 사람이겠는가.
발전은 무슨 발전이란 말인가.
밤 하늘의 달이 세상을 밝히는 또 하나의 무대장치라면, 나는 그저 그것을 고요히 바라보는 이 시간을 좋아하게 됐을 뿐이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다는 사실과 함께.
류이치 사카모토의 Aqua 라는 곡입니다.
자장가로 들어도 좋은 곡입니다.
고요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맡기는 삶
이 곡의 제목처럼
물처럼 흘러가도 좋은
그러길 바라는 삶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삶
“맡긴다”는 말은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손을 덜 쥐는 일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맡기는 삶은
게으름이 아니라
경계를 아는 감각입니다.
어디까지가 나의 의지이고
어디부터가 바람과 시간의 몫인지
조용히 가르는 일.
그 선을 넘지 않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이미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늦게 받아들이는 일.
붙잡고 있던 이유들이
설득력을 잃고
설명하려던 마음도
자리를 비웁니다.
그때 남는 것은
의외로 허무가 아니라
가벼움에 가까운 무엇.
흐르는 쪽으로
몸을 두는 감각.
방향을 정하지 않아도
어딘가로 간다는
이상하게도 충분한 믿음.
무언가를 포기하는 태도가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을
끝내 인정하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아무런 욕심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