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의 깃발 아래서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 것들의 봄

by 구시안

박공에서 커다란 꿈의 깃발이 나부낀다.

하얗고도

검은 것도 아닌

흑백의 색깔에 깃발이

눈보다 훨씬 깊은 눈이

그곳에서 망을 본다.


저렇게까지

높이 날아갈 필요는 없는데

이별을 위해 꺼냈던 말처럼

문 앞에서 나를 환영하고

타인을 스치고 간

하나의 꽃이

서서히 바랜다.

그렇게 손님이 되어

나를 더 이상 스쳐가지 않는다.


밤의 고요한 나무는

방에 들어섰다.

너무나도 가까워서

마치 여기에 없는 것 같은

고요한 창문 속에

고요한 문이 흔들린다.

마치 떠나지도

안주하지도 않겠다는

의지를 갖은 듯

결코 있어본 적이 없는 곳에

자리한 것처럼

언제나 머물거나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처럼

흑백 꽃의 곁에 잠시

머물고 있다.


하늘만큼 넓게

이 봄에게

눈꺼풀이 펼쳐졌다.

새순에 덮여

영원한

꽃을 피울 모양처럼

검은 새순을

나는 싹트게 한다.


충만하게,

태양이 헤엄쳐

지나간 이 밤의 바다 위로

이 밤의 졸졸 흐르는 시간이

마지막 장미를

먹여주기를 기다린다.


내 동경의 거절된

봉인된 비밀들과

지난 이야기들이 모인

광장에서 비둘기가

이름들을 쪼아 먹던

세상의 가장자리

어느 고요한 방 안에서

침묵으로 숨겨진 눈(眼)이

흩날린다.


낮고 밤의 중간의 문에

열쇠를 꽂고

흩날리는 모든 것이

허락된 말.

밀어내는

끌어당기는 사이에 서서

열쇠를 바꾼다.


바람에 따라

말 주위로 눈(眼)이 뭉친다.


한 해가 지난 뒤에

늘 이어지는 봄의 자락에

저주와 축복의 말을 엮어

그 이후로는 두 번 다시 말하지 않을

단어를 골라 쓰며

저 하늘보다 더 검기를 원하는 곳을

원하는 이 도시처럼

잠 속에 모든 것이 누워 있기를

누군가의 구름들이 모여

다스리는 도시

그 저녁들로부터 탄생한

이 도시

그리고 이 밤의 깊이를

은은한 빛 옆에

밝은 빛 옆에

저녁이 되지 못한 채

찾아든 권태에게

나의 속눈썹을 달아준다.


잊지 않고

머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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