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있어도, 함부로 만질 수 없는 것
카산드라가 트로이의 침공을 예언었했을 때,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저주를 얻게 되었을 뿐이다.
누군가의 말을 믿어 준다는 조건은 무엇일까.
나는 그 조건을 찾는 것을 이미 멈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낌을 가지고 생각하고, 이미 자신이 옳다는 방향으로 나침판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나서다. 느끼는 것이 사는 것이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살지 안다는 것이기에,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의 양식에 대꾸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수많은 카산드라가 지구 안에 살고 있다.
철학자 아미엘은 우리가 보는 모든 풍경은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라고 말했다. 나약한 몽상가의 부서지기 쉬운 행복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풍경은 풍경이 되는 순간 이미 객관화를 겪고 있는 것뿐이다. 객관화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이미 완성된 글을 고치려고 애쓰는 짓을 멈추게 된 것도 어느 순간부터 나의 객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시를 쓰려고 생각했던 상태와는 다른, 내가 꿈꾼다고 말하는 대신에 본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미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상관없이
계절은 바뀌고
풀은 자라고
꽃은 피우고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린다.
은유의 진실을 포기한다는 것이
단순해지는 일이었다.
도시를 고루 비추는 달빛 아래 펼쳐진 광활한 도시에 노란색 등이 일렁인다. 나의 키는 183센티이고 78kg의 몸무게를 갖고 있다. 이런 신체조건들을 지탱하고 있는 이 대지 아래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나, 중력의 적당한 느낌을 받고 지탱해 가는 이 순간을 감사해야 한다는 느낌만 물들고 있을 뿐이다. 나 자신이 행복하다고 상상할 수 있는 위안을 부리지는 않는다. 있는 그대로 느끼고 보고 쓸 뿐이다.
아무도 없는 산봉우리에 오르면 이상한 특권을 누린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산 정상보다 높아지는 느낌. 적어도 그 장소에서는 자연에서 가장 높은 곳이 두 발아래 있다는 사실에, 세상의 왕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나보다는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고, 경사진 비탈길 혹은 높이 올라 정점에 이르기 위한 사투를 벌였던 사람 중에 하나였기에 눈앞에 놓인 낮은 평원을 무시하는 느낌. 이미 산 봉우리에 올랐어도 나의 키는 183센티일 뿐인데도 말이다.
수월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내려와
마시는 막걸리 한잔에
현실로 돌아온 거지왕자처럼 자리하지만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는
생각의 바다는 놀랍도록 넓혀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산 골짜기에서 하늘까지의 거리와
산 정상에서 하늘까지의 거리는
사실 별 차이가 없다.
바람을 쏘이고 싶었을 뿐,
몸을 낮춰 재앙을 피하는 편이 좋은 세상을
살아가며 높이 오를 수 있는 잠재력을
근육에 담아 놓고,
차라리 산을 오르기를
거부하는 자가 되어 있다.
움직이지 않는 구름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은
투명한 흰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순간
순간
순간
침묵이 어둠을 더욱 검게
칠하는 시간처럼
시간의 속도의 순수한 모방을 지켜보며
잠시 그렇게 머물러 있던 시간이
좋았을 뿐이다.
단순한 속도 안에 살아가고 있다.
완전한 집중이 흐트러져 불편하거나
나만의 고유한 특징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물드는 밤이다.
이 위험이 지루해질까 봐 두렵다.
위엄이 있는 곳에는 결코 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무언가를 강렬히 느끼는 게 두려워서
위험을 멀리하지 않을 뿐이다.
원하는 대로 속도를 높이거나
낮출 수 있었다면
이렇게 살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이 반복적인 단순한 순간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회복.
회복이라는 생각은
도시 변두리에 있는 마을을 생각하게 한다.
거리의 차가 별로 없고
소음에서 멀리 떨어진
아늑한 안뜰이 있는
집안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나는 거기에 서 있는
미련한 곰인형처럼 서있다.
높이 성글게 떠 있던 구름도
바람에 실려 잠을 자고
비겁한 하늘은
공기로 만들어져
소리 없는 뇌우처럼
대기를 위협하기도 하지만
날아다니던 새들도 어디론가
아늑한 공간을 찾아 잠에 들었을 것이다.
공중에 방치한 듯 떠 있는
가벼워 보이는 것이 무겁게 보이는 날도 있다.
시간과 공기
안개 없는 안개처럼 보이는 구름.
가짜 폭풍의 찢어진 옷자락처럼 보이는
흐릿해져 가는 도시의 사물들.
이 풍경과
이 사색을 끝장내기 위해
잠을 청해야 하지만
이미 검은 진흙 수렁에 손을 담갔다.
단순하고 함축적인
고백 같은 글을 쓰고 싶었다.
싫증 나지 않던 모든 것을 포함해서
영글어가는 포도덩굴이 얕은 물의
어둡게 빛나는 표면을 터트리며
어느 변두리 개천가에서
종이배를 만들어 띄우는 어른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인생 사이에는 아주 얇은 유리 한 장이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처럼
또렷하게 바라보며
누구의 것이 아닌
내 인생을 이해한다 해도
이것을 함부로
결코
만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 물드는 밤이다.
따분한 삶이 되는 이유는
어쩌면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얼마나 열렬히 원하고
그것의 다름을 만끽하며 살아가기에
자신 스스로에게 써 줄 에너지는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누군가 나를 유혹한다면
나는
당장
내 앞에서
꺼지라고 말해줄 것이다.
아무리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가 봐도
내 꿈속의 모든 길은
근심이라는
빈터에 가 닿아 있다.
이 빈터에는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 빈터에만은 아무도
들어오게 하고 싶지 않다.
어리석은 도피처 하나는 두고 살고 싶기에
내 인생으로 나를 두들겨 패는 것이
내 인생인 것 같다.
혼자만의 빈터 하나는 지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