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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31. 2022

세배, 새해에

[개벽통문-234-1]

[편자 주] 천도교회월보강독회 6-2회(01.25)에서는 "세배(오상준-박길수)" "유불선합일해"(박명선-라명재), "시자(侍字)문답"(오지영-성강현)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세배"는 1911년 1월호(회월보 제6호)를 맞이하면서, 독자(천도교인)들에게 "세배드립니다"라는 인사말로 시작하여, 모두 3편의 글을 써 나갑니다.(각각의 글을 회월보 편집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배치하였습니다.) 이 글은 대체로 한문 위주의 글인 회월보에서 "순한글"로 쓰였습니다. ("시자문답"도 순한글) 말하자면 새해 덕담(德談)으로서 천도교인와 세상사람들이 함께 누리고 생각하고 도모해야 할 새해 새날 새길을 이야기합니다. 




세배(歲拜)

 

옥천자(오상준), 천도교회월보, 제6호, 1911.01.15


1. 


세배하옵나이다. 우리 일반 교우 형제자매에게 대하여 간절히 지는 해를 치하하고 새로 새해를 축원하노이다. 


대저 지난날 미진한 일을 오는 날 성취함과 저문 날 아득한 마음 밝은 날 새롭기는 이치에 당연한 바라. 생각건대 우리가 모두 어제같이 포덕 오십일 년(1910) 사람으로 오늘날 오십이 년(1911) 사람이 되었으니, 작년의 지는 일과 금년의 맞이하는 일을 한 번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대강 생각하더라도 작년 한 해 동안에 우리 교가 발전되기도 얼마큼 되었으며 우리 마음 열리기도 얼마큼 되었으며, 우리 육신 보호되기도 얼마큼 되었으니, 진실로 말하자면 하늘님(하ㄴ.ㄹ님)과 스승님[神師]의 간섭이지마는, 우리의 심력도 쓰이지 않은 바가 아닙니다. 그러면 지난 일은 우리가 서로 치하하며 서로 위로하여 천덕과 사은을 송축하려니와, 오늘 새해를 맞이하였으니, 장차 어떻게 마음을 써야 되겠다는 생각이 또한 없지 않을 바입니다. 


대개 하늘의 때와 사람의 일은 매양 한길로 따르는 것이라. 지난날 가을바람과 겨울눈에 잎사귀가 떨어지고 가지가 말랐던 더 초목을 보십시오. 갈재[葭灰: 갈대의 재]가 한번 날고 북두(北斗)가 동을 가르치자 저와 같이 죽었던 풀, 얼었던 나무가 모두 새로 정신을 머금는데 우리는 사람이라, 나이를 한 살을 더 먹었으니 고기 한 근이라도 더할 것이요, 지식으로 말하더라도 얼마큼 경력이 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작년과 금년이나, 금년과 작년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한 모양일진대, 저 초목이 부끄러울 뿐 아니라 어찌 하늘의 도와 사람의 일에 합당타 이르겠습니까. 그런즉 우리 오십이 년 사람은 오십일 년 사람보다 한층 생각을 지극히 함이 당연한 일이라. 만일 작년에 열 정신을 들였으면 금년에는 백 정신을 더할 것이요, 작년에 백 정신을 들였으면 금년에는 천 정신을 더하여 교무를 발전함과 성령을 수련함과 육신을 보호하기로 일신하고 다시 일신하는 것이 우리 교인의 금년 제일 작정할 정신 점이 될 줄로 생각합니다. 이 같이 하면 오십이년도의 신년 성적을 오늘날 미리 결산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고 생각하니 너무 감축하여 이처럼 세배하옵나이다. (그러나)


맨 끝에 '그러나'라는 말은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다음에 계속"이라는 뜻입니다. 대개 회월보에서는 연재글인 경우 "未完(미완)"이라는 말로 맺는데, 여기서는 특이하게 '그러나'라고 한 점이 재미있습니다. 


첫 번째 세배 후에서는 해[年]가 새로워진 것은 한울님과 스승님의 은덕이지만, 우리의 심력(心力)도 쓰였음을 상기하면서, 새해가 되고 새봄이 오면 죽은 듯하던 초목이 새싹이 돋고, 새 생명을 선보이는바, 사람인 우리 또한 "새 마음" "새 생각"을 갖추어 나감이 당연한 인사(人事)가 아니겠는가,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워짐의 요체는 "(1)교무(敎務) 발전[천도교 일] (2)성령 수련[개인 차원] (3)육신 보호[개인과 사회 차원]"의  세 방면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교무+성령+육신의 세 영역은 이후 다른 글에서도 가끔 등장하는, 천도교 활동(신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이는 오늘에도 유효한 설정이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는다/한다'고 하는 것은 "신앙"과 "수련(수양)"과 "활동"의 세 방면을 겸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   100년 전의 설날 덕담 "세배" 두 번째 절입니다.


세배 하옵나이다. 우리 일반 교우 형제자매에게 대하여 간절히 지는 해를 치하하고 새로 새해를 축원하노이다. 


오늘은 포덕 오십이 년이라. 천지도 새로웠고, 일월도 새로웠으니 오늘은 우리도 새로운 사람입니다. 사람이 새로우면 마음도 새롭고, 마음이 새로우면 새로운 일을 진보하기는 물론 그러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두 번 절하고 다시 축원하는 바는 다름 아니라, 대저 마음을 새롭게 하든지 정신을 새롭게 하든지 모두 정성을 새롭게 함에 있는 것이라, 다시 말하자면 정성이란 것은 항상 됨을 요구하고, 한결같이 함을 이르는 것이니, 새롭게 한다 말할 수 없거니와 우리의 실지를 말하자면 한 이치가 없지 아니합니다. 


해와 달이 길고 멀어 마음이 지루하면 정성이 감손(減損)되기 쉬운 것이요, 또 믿음이 아직 지극치 못하여 마음을 정하지 못[未定]하면 정성이 지극하기 어려운 것이라. 그러면 지난날 지리한 마음을 오늘날 새로 깨워, 지난날 많이 쌓은 정성을 조금도 줄어들지 않게 하고 더욱 더욱 지극히 하는 것이 이것이 새롭게 하는 것이요, 지난날 정하지 못한 마음 오늘날 확정하여 지극한 정성을 많이많이 쌓으면 이것이 새롭게 하는 것이니, 우리는 정성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정성이 새로우면 새로운 복이 많을 것이요, 정성이 새로우면 새로운 일을 이룰 것이니 우리는 정성을 새로이 해야 할 것입니다. 


대개 영(靈)을 통하기도 정성에 있는 것이요, 이치를 깨치기도 정성에 있는 것이요, 하늘의 감응을 받기도 정성에 있는 것이니, 내게 있는 내 정성을 새롭게 하고 또 지극히 하면 작년에 못 얻은 영통을 금년에 통할 것이요, 작년에 못 깨친 철학을 금년에 깨질 것이요, 작년에 못 얻는 감응 금년에 받을 것입니다. 


대저, 한없는 것은 복록이요 지극한 것은 정성이니 우리의 정성 지극할수록 저 무한한 복록이 다 내 물건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인이 새해에 제일 결심할 것은 내 정성을 더욱 새롭게 하고 더욱 지극히 할 것이라 하노니, 이같이 아니 말면 한울님[天地] 스승님[神師]이 감화하는 가운데 무슨 일을 일을 이루지 못하리오. 생각고 생각하니 너무 감축하여 이처럼 세배 하옵나이다. (그러나)


이 절에서는 먼저 새해를 맞이하여 "신(新)-천지" "신-일월" "신-인간" "신-심사(心事)"를 이야기하고, 여기에 더하여 "정성이 새로워져야 마음도 새로워지고 정신도 새로워짐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성이란 "일관성-전에 하던 것을 꾸준히 계속함"이 그 본질인데, "새로운 정성"이란 무슨 말이냐고 자문(自問)합니다. 


이러한 자문에 자답하기를 사람의 정성이 길이 장원(長遠)하면 지리해지고 지리해지면 정성이 감손(減損)하며, 또 사람의 마음이 미정(未定)하면 정성이 미달(未達)하는바, 감손이 없게 하고 미달되지 않게 하는 것은 오로지 정성을 깨워 늘 새롭게 하고, 미정한 마음을 확정(確定)하여 정성을 쌓고 또 쌓는 것이 곧 정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성이 새로우면 다복(多福)하고, 정성이 새로우면 새로운 일을 많이 이룬다고 하였고, 한울님의 복록은 무궁무한하므로,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가 정성을 새롭게 하기로 결심하면 그 무한무궁한울님의 복록을 다 받게 될 것이니, 여러분들을 감축하지 않을 수 없어서 세배한다고 하였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 모두 정성을 새롭게 하여 무궁무한한 한울님 복록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3. 100년 전 설날 덕담 세 번째 절입니다. 


세배하옵나이다. 우리 일반 교우 형제자매에게 대하여 간절히 지나간 해를 치하하고 새로 새해를 축원하나이다. 


오늘은 포덕 오십이 년이라. 묵은 해 다 지나고 새해를 당하였으니, 지난날에 열 가지 쓰던 정성 오늘날에 백 가지 더 힘쓰고 지난날에 백 가지 쓰던 정성 오늘날에 천 가지 더 힘쓰면 무궁한 복을 받고 좋은 일을 이루는 것은 물론이니, 거룩한 일입니다. 


이것도 좋지마는 그러나 이 사람이 세 번 절하고 다시 축원하는 바는 다름 아니라 대저 복이란 것도 적은 복과 큰 복이 있으며, 좋은 일도 조금 좋은 일과 많이 좋은 일이 있나니 얼른 말하자면, 내 일신이나 내 집안에서 복 받는 것은 적은 복이요, 일반 교인이 일체로 복 받는 것을 큰 복이라 할 것이요, 내 일신이나 내 집안에서 좋은 일 얻는 것은 조금 좋은 일이요, 우리 교 전체로 좋은 일 얻은 것은 많이 좋은 일이라 할 터입니다. 그러나 큰 복과 좋은 일이 이뿐 아니니, 다시 말하자면 온 세상 사람이 모두 좋은 일 얻는 것이 과연 제일 큰 복과 제일 좋은 일일 줄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능력과 어떤 방법으로 이같이 제일 큰 복과 제일 좋은 일을 실행할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생각하면 어렵지 아니하니, 그 방법과 그 능력은 다만 포덕(布德) 두 글자에 있습니다. 대개 포덕이란 것은 덕을 펴는 것이라. 한 사람이 두 사람에게 포덕하면 세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요, 두 사람에 네 사람에게 포덕하면 여섯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니, 이로 보면 오늘날 우리 교인이 누백 만 명이라. 만일 한 사람이 열 사람씩 포덕하면 이천만 사람이 한 가지로 복을 받을 것이요, 한 사람이 스무 사람씩 포덕하면 사천만 사람이 한 가지 목을 받을 것이라. 이리 하면 온 세상 사람이 모두 하늘백성(하ᆞ날바ᆞᅟ긱성)이요, 온 세상 나라가 모두 하늘(하나ᆞ갈)나라가 될 것이니 거룩하다 이것이 과연 큰 복이 아니며 이것이 과연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포덕이란 것은 나의 지극한 마음이 저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한 후에야 되는 것이니 다시 말하자면 사람사람이 저마다 포덕하기가 쉽다 이를 수 없는 터라. 그런고로 나는 말하기를 포덕을 많이 하는 사람은 제일 정성이 지극한 사람으로 인정하노니, 정성이 지극하여야 포덕으로 일삼아서 이 사람에게도 포덕 권고, 저 사람에게도 포덕 권고, 한 번 권고에 아니 되면 열 번을 권고하고, 열 번 권고에 아니 되면 백 번을 권고하여 기어이 그 사람을 감동케 하여 덕을 받게 할지니, 이같이 아니 말면 포덕 못 할 사람 그 누가 있으며, 덕을 아니 받을 사람 또 누가 있겠습니까. 


거룩하신 우리 교우 형제자매들이여! 지난날 포덕에도 얼마큼 힘썼지마는 오늘은 더욱 포덕을 힘쓸 때라. 하물며 포덕운수가 물밀듯하고 포덕바람이 동서양을 통달한 오늘이야, 정성만 있고 보면 아니 될 수 만무하니, 좋은 때를 잃지 말고 이 좋은 새해 새 정신과 새 정성으로 많이많이 포덕하시기를 바라고 바라나이다. 이같이 하면 포덕한 사람도 복덕(福德), 포덕 받은 사람도 복덕, 이 사람도 복덕, 저 사람도 복덕, 복덕복덕 많이 모아 우리 목적 달하리로다. 생각고 생각하니 너무 감축하여 이처럼 세 번 절하나이다.  


세 번째 세배에서는, 새해 복 받는 일을 말하면서 복에도 "작은복"과 "큰복"이 있는바, 일신(개인)의 복이나 내 가정의 복은 작은 복이요, 교회 전체 - 교인 전체로 받는 복은 그보다 큰복이요, 온 세상사람 전체로 좋은 일과 복받는 일이 가장 큰 복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큰 복" - '세상사람 전체로 좋은 일, 복받는 일'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포덕(布德)"이라고 하였습니다. '포덕하는 일'은 포덕되는 사람에게 복을 주는 일이지만, 포덕하는 사람도 복을 받는 일이며, 이렇게 포덕이 날로 늘어나면 온 세상 사람이 하늘사람이 되고 온 세상이 하늘나라가 될 것이미, 말하자면 이는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이 되며, 기쁨을 나누어 배가 되는 일이라는 뜻을 간절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좋은 때를 잃지 말고 이 좋은 새해 새 정신과 새 정성으로 많이많이 포덕하시기를 바라고" 바란다면서 "이사람도 복덕, 저 사람도 복덕, 복덕복덕 많이 모아 우리 목적을 달성하자"고 당부합니다. 


내일, 설날을 맞이하여 모두 복덕복덕 즐거운 설을 쇠시고, 새해에는 새 정성으로 포덕 많이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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