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어린이> 편집인)
- 이정호(<어린이> 편집인)
[<어린이> 제9권 제4호 (1931년, 소화6년, 5월 20일 발행]
동무여!
깃거운 봄과 함께 우리들의 명절! 어린이날이 또 찾아 왔다.
그리하여 해마다 자라나는 우리들의 이 깃거운 날도
벌써 열 번째의 돌*을 맞이하였다.
동무여!
이 날이 한 해 한해 거듭함은
즉 우리들의 세상이 그만큼 넓어지고
우리들을 위한 새로운 복리가 그만큼 늘고 커짐은 물론
장차 올 새 조선의 기초가
그만큼 튼튼히 자리 잡혀짐을 의미함이라.
누가 이 거룩한 날을 깃브게 맞아하지 않으랴!
동무여!
벌써 나팔 소리가 들리노나.
어서 거리로 뛰어 나와
우리들의 행렬에 합치여 노래를 부르자!
가장 진검한 생각과
가장 경건한 태도로
이 강산 3천리가 쩡쩡 울리도록
목소리를 다하여
우리들의 노래를 부르자
*이정호는 천도교소년회가 창립된 1921년 5월 1일을 '어린이날 기점'으로 삼아, 이해를 어린이날 '열 번째 돌'이라고 하였다. 이런 견해는 오직 이정호에게서만 보인다.(장정희)
[편집자 주] 이정호는 <어린이> 창간호 1면에 천도교소년회 창립 경과보고를 쓴 인물로 이후 계속해서 어린이지 발간에 참여하였다.(개벽사 직원) 그는 방정환이 길러낸 <천도교소년회> 회원으로 시작하여, 방정환의 심부름꾼이 되었고, 이윽고 방정환의 동지가 되었으며(동화 구연 등을 함께 다니고, 어린이지 편집에 계속 참여), 마침내는 방정환의 후계자, 계승자가 되었다.(방정환 사후-1931.7-에 <어린이> 편집 책임자가 됨) 그는 방정환과 가장 닮은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는 방정환의 피땀이 서려 있는 개벽사를 마지막까지 지킨 유이한 인물(이정호+차상찬)이기도 하다. 개벽사가 실질적으로 문을 닫은 1934년 이후 잠시 일반 신문사에 몸담았던 이정호는 1939년에 병사하였다. 그 역시 그의 선생님이자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과로로 인해 허약해진 몸을 견디지 못하고, 요절한 것이다. 그는 수백 편의 창작, 번안 동화와 어린이운동에 관한 글들을 남겼다.(글의 스타일이나 주장하는 내용이 방정환의 빼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