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May 05. 2022

첫 어린이날 노래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들판을~

오월은 푸르고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오늘날 불리는 어린이날 노래는 1948년에 윤석중(尹石重) 작사, 윤극영(尹克榮) 작곡을 지어진 노래이다. 그렇다면 어린이날이 처음으로 시작된 1922년 당시의 어린이들은 무슨 '어린이날 노래'를 불렀을까?


아래의 노래가 그것이다. 소파 방정환이 가사를 짓고(소파 방정환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동지인 김기전이 지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널리 불리던 야구가(野球歌)의 곡조를 붙여서 불렀다. 이 야구가란 실은 <독립군가>의 곡조와 같은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쁘고나 오늘날 오월 일일은~"으로 시작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초창기의 어린이날은 5월 1일이었다. 그것이 일제 강압으로 '일요일'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해방 후 첫 어린이날(일요일)이 5월 5일인 인연으로, 5월 5일로 못이 박혔다. 100주년을 맞으며, 노동절이기도 한 5월 1일을 다시 어린날로 되찾자는 말도 나오고 있다. 


곡조뿐만 아니라 가사도, 어린이의 날의 뜻을 현재의 것보다 훨씬 더 잘 표현하고 있다. 대학시절 "독립군가"를 불러 본 이라면 알다시피, 이 노래는 "유쾌하게"보다는 "장엄하게" 부를 때 더 '맛이 나는' 노래이다. 당시 어린이들이 '유쾌할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자신의 처지로 보거나, 이 노래 가사가 지향하는 '목숨 건 사랑' 같은 어린이날의 취지("우리도 사람이다! 사람같이 살아보자!" 같은)를 생각하거나 간에 장엄, 아니면 비장하게 불렀을 가능성이 훨씬 커 보인다. 


얼핏 전해오는 말로는 "만세~" 시작하는 후렴부분은 대개 부르지 못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좀더 자세히 알아보아야 한다.(어린이 잡지 표지 악보도 그 부분이 나와 있지 않다.)  이 노래가 언제까지 불려지고, 어떤 이유로 더 이상 불리지 않게 된 건지를 추적하는 일도, 퍽 흥미로울 터이다. 틈 나는 대로 도전해 보려 한다. 


기쁘고나 오늘날 오월 일일은

우리들 어린이의 명절날일세

복된 목숨 길이 품고 뛰어 노는 날

오늘이 어린이의 날


(후렴) 만세! 만세를 같이 부르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기쁜 맘으로

노래를 부르면 가세


기쁘고나 오늘날 오월 일일은

반도정기 타고난 우리 어린이

길이길이 뻗어날 새 목숨 품고

즐겁게 뛰어 노는 날 

(곡조는 야구가 '장엄하고 활발한 야구수들아'와 한가지)



어린이 제7권 제4호 표지의 어린이날 노래 


아는 사람은 아시는 이야기이지만, 1922년 5월 1일이 첫 '어린이의 날'이다. 이날은 "천도교소년회" 창립 1주년 기념일이다. 천도교소년회는 소파 방정환 선생등이 주도하여, 1921년 5월 1일 발족한, 천도교청년회의 '특설기관'이다. 이 소년회에도 소년회가가 있다. 그때 노래가 지금도 불린다. 



씩씩하고 참된 사람 아름답고 새로운 사람

같은 마음 같은 뜻 한 보법(步法)으로 같은 바음 같은 뜻 한 정신(精神)으로 


천도교소년회원과 방정환. 천도교중앙대교당 측면 출입구 앞이다. 지금도 이 자리에서 사진을 직을 수 있다. 

천도교소년회는 '천도교인 소년(남녀)'만을 대상으로 한 단체가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당시 천도교소년회를 창립한 주역인 김기전, 방정환의 글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조선의 소년소녀는 누구나 소년회원이 되거나, 굳이 회원이 되지 않다도, 소년회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고,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제한이 없없다. 여기서 외국인이란 미국이나 유럽 소년이었을 리가 없다. 아마도 일본인 소년소녀를 염두에 둔 것일 터이다. 일본인 또는 외국인이 천도교소년회에서 활동하였다는 기록은 아직 찾지 못하였으나, 소년운동의 근본정신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 어린이들을 어찌 하지...."


이것이 소파 방정환이 그의 동지 조재호(색동회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이 말을 조재호에게 하고, 다시 가족들에게 몇 마디 한 후 소파는 숨을 거두었다.(경성제대 부속병원 - 오늘날 연건동 서울대병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