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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ug 19. 2018

토착적 근대화 학술발표 이야기 3

-동학공부 39


토착적 근대화 학술발표 이야기 3

-동(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다 

...


역시 김태창 선생님의 토론 총평의 두 번째 화두는 ‘토착적 근대화’ 세력[cf. 개벽파 : 동학, 증산도, 대종교, 원불교]의 시작점이자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동학’에서 동(東)의 의미이다.

...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교과서 수준에서는 ‘동’을 ‘서’에 ‘대항’하고 ‘반대’하고 ‘대안’으로서 제시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최근 들어 ‘동’은 ‘우리나라’이며, ‘동학’은 ‘우리 학문’이라는 해석, ‘동’은 ‘생(生)’의 방위(方位)로서 동학은 ‘살림의 학문’이라는 해석이, 동학을 새롭게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힘을 얻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김태창 선생님은 일본에서의 의미에 비견하여 새로운 의미를 도입하자고 제안하셨다. 즉 일본에서 동(東)은 아즈마(あずま, 東)로서 “아직 진압되지 않은 지역”의 의미가 있는 반면 서(西)는 이시(にし, 西)로서 “이미 진압되고 제압된 지역”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데서 착안하여, 동학(東學)은 당시 세계를 휩쓸며 밀려오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세계 흐름에서 정복되지 않고, 진압되지 않는 땅으로서의 ‘동’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라고 제안하신 것이다. 후에,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어도, 끝까지 지배받지 않고 회복하려고 했던 3.1운동을 동학(천도교)이 주도한 것도 그런 점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생각을 덧보태자면, 여기서 '서세동점'의 '서세'의 의미가 중요하다. 서세는 1차적으로 신자유주의(제국주의)의 흐름[이 흐름은 지금까지도 세계사를 지배하는 주류적 흐름이 아닌가!]의 정치/경제/사회/문화/과학/철학을 이야기하지만, 2차적으로/본질적으로는 각자위심의 세태로 서의 하늘과 생명(인간)의 분리, 혹은 하늘을 퇴출시키는 문명으로서의 서세-근대문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서세-근대'를 '서구적 근대'라고 쉽게/간단히/논리적으로 명명(命名)하는 것이며, 그것을 치유하고/바로잡고/되살리는 근대로서의 '토착적 근대' '영성적 근대' '접화적 근대'이 되려면 바로 '동학적 근대' '개벽적 근대'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김태창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동'은 '살아남은 땅/하늘/사람' '생명이 보존된 땅/하늘/사람' '씨앗으로서의 땅/하늘/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발상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더 감탄과 존경을 자아내는 것은 한순간도, 한 장면도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이 의미를 발견하고, 발명하고, 발전시켜 나아가는 그 태도이다. 김태창 선생님 스스로도, 주최 측의 의도(ex. ‘토착화’라는 말을 쓴 것)를 모르지는 않으나, 그냥 묵묵히 수용하는 것은 학문/학자/학술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짐짓 문제제기를 한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기도 했다.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인 ‘토착적 근대화’를 우리 식으로 ‘개벽’이라고 호명(號名, 呼名)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cf. 개벽파]는 점은 앞에서(학술대회 이야기 2) 이야기했고, 그 연원을 수운 선생의 ‘생어동, 수어동’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는 내 생각도 이야기했거니와 해월 선생은 ‘개벽운수’ 편에서 이에 관한 좋은 화두를 이미 설파하신 바가 있다.


“세상 만물이 나타나는 때가 있고 쓰는 때가 있으니, 달밤 삼경에는 만물이 다 고요하고, 해가 동쪽에 솟으면 모든 생령이 다 움직이고, 새것과 낡은 것이 변천함에 천하가 다 움직이는 것이니라. 동풍(東風)에 화생(化生)하여도 금풍(西風)이 아니면 이루지 못하나니 금풍이 불 때에 만물이 결실하느니라. 운을 따라 덕에 달하고 시기를 살피어 움직이면 일마다 공을 이루리라. 변하여 화하고, 화하여 나고, 나서 성하고, 성하였다가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나니, 움직이면 사는 것이요 고요하면 죽는 것이니라.”(世間萬物 有時顯有時用 月夜三更 萬物俱靜 日出東方群生皆動 新舊變遷天下皆動矣 東風之化生非金風不成 金風吹時 萬物成實 隨運而達德 察機而動作 事事有成矣 變而化化而生生而盛盛而還元 動則生靜則沒矣, 海月法說, 開闢運數)


이 속에서 ‘동’과 ‘서’의 의미는 김태창 선생이 ‘일본’에서 영감을 얻은 ‘동’ ‘서’의 의미와 일치하지 않고, 오히려 상반되는 의미마저 발견되지만, 중요한 것은 동(東, 東學, 開闢派)의 의미를 이 시대에 재발견하는 일이다.


이미 세계는 동과 서를 구분할 수 없는 ‘지구촌 시대’[cf.人類世]에 접어들었고, 올 여름 ‘폭염지옥’을 통해 실감/절감/공감하였듯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생물/생활이 호생(好生)/공생(共生)/상생(相生)이 아니면 공멸(共滅)/전멸(全滅)/괴멸(壞滅)을 면치 못할 세상이 되었는데, 지금에 이 ‘동’과 ‘서’의 차이를 구분하고, 그 가운데 ‘동’의 가치를 강조하고, 되살리고, 계승하겠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좋은 질문이다. 


그 기본적인/초보적인/원론적인 의문에 답하자면, 여기서 동은 역시 ‘동’이 더 잘났다는 東이 아니요 ‘莫非侍天主’으로서의 동이며, ‘西’를 이기겠다는 東이 아니요 ‘서로 살고 살리자’[相生相資/withbylive]는 東이며, ‘동’만 살아남겠다는 동이 아니라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고, 모두[시간과 공간과 생명]를 살리겠다는 동이며, 각자가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마을/장소/지역’으로서의 동이라는 점에서 전면적인/근본적인/개벽적인 차이가 있다고 답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근대화를 생각하고, 개화를 생각하고, 개벽을 생각할 때이며, 그리고 그 답은 ‘동학(원불교, 증산도, 대종교)’이라는 것이 그날(학술대회)의 공감(共感), 공인(共認), 공공(公共)적 결론인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이 지점이다. (다음에는 '(동에서의)토착적 근대화'의 내용으로서의 '공공'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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